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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의 변형
1. 당신은 꽤 최근에 이르러서야 하루 종일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은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젊었을 때에는 진정한 주제가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질적으로 내 삶과 알게 된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주제가 발젼했습니다. 또한 미술 학교나 그와 유사한 곳에 다니지 않았다는 사실도 내가 지체된 이유 중 하나일 겁니다. 미술 교육이 여러모로 이점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미술 학교가 오늘날 미술가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이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대단히 후회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어를 배우지 않은 일 같은 것들입니다. 물론 아주 나중에서야 후회했지만 말입니다. (193)
2. 언제부터 그림이 당신의 삶에서 중요해졌습니까?
그림은 1945년 무렵부터 정말로 중요해졌습니다. 알다시피 천식 및 그 밖의 이유로 인해 나는 입대를 거부당했습니다. 당시 홀이 내게 큰 영향을 주었고 나를 격려해 주었습니다. 또한 그는 지적이고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내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내게 사물의 가치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가령 괜찮은 음식이란 무엇인지를 알려 주었는데, 이는 아일랜드에서는 배우지 못한 것이었죠. 내가 아일랜드에서 이해한 것은 자유로운 삶과 같은 것입니다. (193)
3. 당신이 주제가 없었다고 말한 건 나중애 생각해 보니 그렇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당시에도 그 점을 알고 있었습니까?
지나고 보니 그렇다는 뜻입니다. 나는 늘 벨라스케스의 작품에서 비롯된 그림들을 실패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그것이 내가 다룬 첫 주제 중 하나였을 겁니다. 나는 벨라스케스의 그림에 사로잡혀 그 작품의 사진들을 하나씩 구입했습니다. 나는 그것이 진정한 나의 첫번째 주제였다고 생각합니다. (197)
4. 비명을 지른느 교황을 그렸을 때 나는 그 작품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그리지 못했습니다. 이미 말했듯이 나는 늘 모네의 작품에 매료되었고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지 않을 때에도 그의 작품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내가 모네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사람들은 '아, 그의 작품들은 그저 많은 아이스크림들일 뿐이야"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그의 작품을 제대로 보지 못했죠. 그전에 나는 구강 질병에 관한 책을 구입했는데, 손으로 그린 삽화가 들어간 매우 아름다운 책이었습니다. 비명을 지르는 교황을 그렸을 때 나는 비명을 지르는 교황이 아니라 입을 그 색채및 아름다운 모든 요소와 함께 모네의 일몰처럼 보이게끔 만들고 싶었습니다. 결코 그럴 일은 없기를 바라지만, 다시 그 작업을 한다면 모네의 작품처럼 만들 겁니다. (199)
5. 초상화 작업을 더 일찍 시작하지 않은 이유는 기량의 문제 또는 심리적인 문제 때문이었습니까?
기량의 문제였다고 생각합니다.
살마에 대한 직접적인 관찰이나 기억에 바탕을 두고 그리는 작업보다 기존의 이미지를 토대로 그리는 작업이 더 쉬운가요?
네.
특정 인물을 그리는 경우에도 그 사람을 찍은 사진을 토대로 작업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네, 그렇지만 그 대상은 늘 내가 잘 알고 지냈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사진은 그들의 생김새를 기억하거나 그들에 대한 기억을 바로잡기 위해섬나 사용합니다. 마치 사전을 사용하듯 말이지요. 나는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그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싶지 않을 겁니다. 그 사람을 많이 보지 못했고 그의 생김새와 행동 방식을 관찰하지 못했다면 그 사람을 그리는 작업은 내게 흥미롭지 않을 겁니다. (201)
6. 특정 인물을 그리기 시작했던 시기에 당신은 처음으로 성교 중인 사람들을 그린 작품 두 점을 제작했습니다. 침대 위의 두 사람을 그린 1953년의 작품, 들판 위의 두 사람을 그린 1954년의 작품이 바로 그것입니다. 두 작품은 당신이 그 주제를 보다 본격적으로 다루었던 시기보다 12년 정도 앞서 제작되었습니다. 이후 다시 그 주제를 다루기 시작했고, 그것은 당신의 작품에서 거의 지배적인 주제가 되었습니다.
당연히 그것은 영원한 주제입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사실 다른 주제는 필요치 않습니다. 그것은 늘 나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주제입니다. 나는 이제 사뭇 다른 방식으로 그 주제를 다룰 수 있어야 합니다. 조각을 하고자 했던 때에 그 주제를 다루려던 방식으로 말입니다. 내가 언젠가 그 조각 작품을 제작할지 여부는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나는 조각을 치환한 그림을 그림으로써 그 인물들을 정말로 다른 방식으로 그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단지 조각으로 그러한 인물상을 만들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인체와 관련된 모든 작업들을 시도해 보고자 했던 것입니다. 나는 이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비록 사람이 결코 지워 없어지지 않지만 내가 지워져 버렸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내가 죽음을 망각한다고 말합니담나 그렇지 않습니다. 결과적으로 나는 아주 불행한 삶을 살았습니다. 내가 정말로 좋아했던 사람들이 모두 죽었기 때문이죠. 그들에 대한 생각은 멈추질 않고, 시간은 치유해 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집착했던 대상에 집중하게 됩니다 .그것은 그 집착을 향해 쏟아부었을 에너지를 작업이라는 물리적 활동을 통해 작품에 기울이는 것입니다. 미술가는 사랑에 대한 끔찍한 일 중 하나가 파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 파괴가 없다면 아마 그것들은 결코.... 나는 전혀 알자 못합니다. 알전에 누군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오두막집에 삶녀서 일생토록 아무런 경험도 하지 않았떠람녀 그 사람은 지금의 삶과 똑같은 삶 또는 더 나은 삶을 살게 될꺄? 나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종종 그 답이 궁금하긴 합니다. (205)
7.당신을 떠올릴 때 드는 생각은 아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할때 당신은 그 사람이 어떻게 행동했는지 혹은 극단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할 것 같은지를 분석하고 거기에 비추어 그 사람ㅇ르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입니다. 자신이 그렇다는 걸 알고 있습니까?
당신이 말한 것처럼 그렇게 분명한 방식으로는 아니지만 알고는 있습니다. 나는 사람들이 극단적인 상황에서 행동하는 방식이 그들의 자질을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205)
8.그러한 당신의 시각은 분명하게든 또는 암시적으로든 당신의 작품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 보입니다. 당신이 비명을 그릴 때 이 점이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당신은 차분한 멜라스케스의 교황 이미지에도 비명을 도입합니다. 십자가 책형과 침대에서 격렬하게 성교 중인 사람들, 경련을 일으키는 듯한 자세로 홀로 있는 사람, 팔에 약을 주입하고 있는 누드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나는 이미지를 실재 또는 외관에 보다 강렬하게 고정하는 형식으로서 피하 주사기와 함께 침대에 누워 있는 인물들을 그렸습니다. 나는 주입되고 있는 마약 때문이 아니라 팔을 관통하여 못을 박는 것보다는 덜 어리석기 때문에 주사기를 사용합니다. 못을 사용한다면 훨씬 멜로드라마처럼 보일 겁니다. 나는 살을 침대에 고정하고자 주사기를 배치합니다. 그렇지만 아마도 나는 이 장치로부터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209)
9. 언젠가 당신은 내게 사람들이 나의 그림에서 항상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느낀다고 말했습니다.
네, 맞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늘 죽음을 느낍니다. 삶이 사람을 흥분시킨다면 그림자처럼 그 반대인 죽음도 분명 흥분시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죽음으로 인해 흥분된다기보다는 삶을 인식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죽음을 인식하는 거죠. 동전의 양면 같은 삶과 죽음 사이에서 죽음을 의식합니다. 나는 사람에 대해서나 나 자신에 대해서 죽음을 매우 의식합니다. 나는 사람에 대해서나 나 자신에 대해서 죽음을 매우 의식합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면 나는 늘 놀랍니다. (210)
10.그것은 잣니이 본질적으로 낙천적이라는 당신의 견해와 모순되지 않습니까?
글쎄요. 희망이 전혀 없어도 낙천적일 수 있습니다. 사람의 기본적인 본성은 전혀 희망을 품고 있지 않습니다만 사람의 신경계는 낙천적인 물질로 만들어집니다. 하지만 그 낙천성은 탄생과 죽음 사이의 짧은 기간에 존재하는 삶에 대한 나의 인식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늘 의식하는 바입니다. 나는 이 인식이 내 그림에 반영된다고 생각합니다.
11. 나는 르누아르가 가장 아름다운 풍경화를 그렸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의 작품 속 인물들에게 별 관심이 없지만 삶에 대해 나와 같은 태도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 내가 보기엔 당신도 그런 것 같습니다만 - 여름날 오후 기분 좋은 멋진 햇살 아래 일광욕을 하고 있는 듯 보이는 그 인물들에게서도 죽음의 그림자를 느낄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나는 르누아르의 작품에서도 내가 드가나 렘브란트, 벨라스케스의 작품에서 인식하는 것처럼 죽음을 어느 정도는 인식합니다. 물론 사람들은 특히 벨라스케스의 작품에서 죽음을 알아차립니다. 이것이 벨라스케스의 대단히 세련된 면모 때문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분명 그는 궁중 사회에서 생활하던 매우 세련된 사람이었죠. 그리고 그는 아마도 당시 궁중 주변의 사람들 중 진정한 교양을 갖춘 유일한 사람이었을 겁니다. 그것이 바로 왕이 그를 가까이 두고자 했던 이유였습니다. 벨라스케스가 적어도 잠시 동안이나마 그 왕의 시대를 활기차게 만들어 주는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벨라스케스의 모든 그림에서 그가 느꼈던 게 분명한 순전한 신랄함을 느낍니다. 심지어 인물들이 멋진 구도를 이루면서 모네의 작품과 같은 색으로 채색된 아름다운 작품에서조차 말입니다. 그의 그림에는 삶의 그림자가 항상 드리워져 있음을 느낍니다. (213)
12. 나는 1927~1928년의 베를린을 목격했습니다. 당시 베를린은 무방비의 도시여서 어떤 면에서는 매우 난폭했어요. 아마도 내가 아일랜드에서 왔기 때문에 폭력적으로 느꼈을 겁니다. 아일랜드는 군사적인 의미에서 폭력적이었을 뿐 베를린처럼 정서적인 의미에서 폭력적이지는 않았거든요. 그 후 베를린에서 다시 파리고 옮겨 갔습니다. 그때부터 1939년 전쟁이 발발하기까지의 어지러운 시절을 파리에서 보냈습니다. 따라서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나는 늘 폭력의 형태를 경험하는 데 익숙했습니다. 그건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수도 미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나는 영향을 받은 것 같습니다. 내 삶에서의 폭력, 그러니까 나를 둘러쌌던 폭력은 그림에서의 폭력과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물감의 폭력성은 전쟁의 폭력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실재의 폭력성 자체를 새롭게 만들려는 시도와 관계가 있죠. 그리고 실재의 폭력성은 장미 등이 폭력적이라고 말할 때 의미하는 단순한 폭력성일 뿐만 아니라 물감을 통해서만 전달될 수 있는, 아미지 자체에 내포된 암시의 폭력성이기도 합니다. 테이블 건너편의 당신을 볼 때 나는 당신뿐만 아니라 당신으로부터 발산되는 전체를 봅니다. 그것은 인간성을 비롯한 모든 측면과 관계가 있습니다. 내가 초상화 작업에서 하려는 것철머 그 폭력성을 그림에 펼치는 것은 그것이 물감을 통해 폭력적으로 보일 거라는 점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거의 언제나 장막을 두른 채 살아갑니다. 가려진 존재인 셈이죠. 때때로 살마들이 내 작품이 폭력적으로 보인다고 말할 때 내가 가끔은 그 장막 한두 겹을 제거할 수 있었나 보다 하고 생각합니다.(215)
13. 분명한 것은 당신은 뭉크처럼 인간의 본성에 대해 말하고자 그림에 관심을 갖는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물론입니다. 나는 단지 이미지가 가능한 한 정확하게 나의 신경계에서 빠져나오도록 만들려고 노력합니다. 나는 이미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반도 채 알지 못합니다. 나는 어떤 것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경우에 무언가를 이야기하는지 여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나는 정말로 어떤 것도 이야기하지 않아요. 아마도 내가 뭉크보다 작품의 미적인 특성에 대해서보다 더 관심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주 별 볼 일 없는 미술가들을 제외한담녀 어떤 미술가들이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하는지 나로선 알 수 없습니다. 나는 헬리 푸젤리와 같은 삶들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생각해 낼 수 없습니다. (215)
14.비슷한 일이 알베르토 자코메티에게도 있었습니다. 그의 작품 속 인물을 실존주의적인 인간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었지요.
자코메티는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그는 그 해석이 매우 터무니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은 그저 본 것을 모사하려 할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그가 단순히 자신이 본 것을 모사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그는 본다는 행위, 특히 당신을 틀여다보는 누군가를 응시하는 행위에 대한 매우 복잡한 느낌을 구체화했습니다. 외관 외에 당신의 그림은 무엇과 관계가 있습니까?
내 그림은 내 마음과 관련이 있습니다. 아주 유쾌한 방식으로 표현하자면, 그것은 명랑한 절망감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고 싶었다고 말한 바 있는 조각에 대해 이야기해 보죠. 지금은 그 구상을 거의 포기했습니까?
조각을 하게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조각보다 물감으로 이미지를 보다 만족스럽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 시작하지는 않았짐나 그 이미지들은 조각으로 상상해 봄으로써 내가 그것을 물감으로 여떻게 만들 수 있을지 그리고 물감으로 어떻게 더 잘 만들 수 있을지 그 방법이 갑자기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구조적인 그림이 될 것입니다. 그 그림에서 이미지는 말하자면 살로 이루어진 강에서 생견라 것입니다. 무척 낭만적인 생각처럼 들리지만 나는 대단히 형식적인 관점에서 그 이미지를 그립니다. (218)
15. 나는 이미지를 연속적으로 봅니다. 삼면화를 넘어서서 대여섯 개의 캔버스를 함께 그릴 수도 있지만 삼면화가 보다 균형 잡힌 단위라고 생각합니다. (221)
16. 그런데 당신은 그 연작이 하나의 단위라면 삼면화로 충분하다고 말합니다. 대형 삼면화와 관련하여 당신이 균형에 대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이제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삼면화에서 좌우 양 측면의 캔버스는 종종 그 구성이 매우 흡사하여 때로는 서로를 비추는 거울 이미지 같습니다. 그리고 중앙의 캔버스에는 대조적인 구성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머리를 글니 삼면화의 경우에는 머리를 단순히 일렬로 나열합니다. 그래서 이미지가 계속 연장되어 나가는 것을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이는 때때로 네 개의 머리를 각각의 캔버스에 그린 연작이 필름 스트립처럼 네 개의 머리를 한 화면 안에 함께 그려 넣은 작품과 동일합니다. 따라서 네다섯 개의 머리를 그린 다면화를 제작하지 않았다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그런 작품에 대해 이따금 생각해 보기도 했습니다. 반면 삼면화는 경찰 보고서처럼 양쪽 측면 얼굴, 정면 얼굴로 구성됩니다.
삼면화에서는 각 캔버스가 각자의 틀 안에서 담기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죠. 파리에서 전시를 했을 때 구겐하임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삼면화 '십자가 책형'을 별렸습니다. 세 개의 캔버스가 모두 함께 하나의 액자에 끼워져 있었는데, 나는 아주 불만스러웠습니다. 그것이 그림 전체를 완전히 망쳐 놓았던 겁니다. 나는 미술관 측에 내가 세 개의 캔버스를 합치고 싶었다면 애초에 그렇게 했을 거라고 글과 말로 내 의견을 전달했습나다. 하나로 합치면 균형이 깨집니다. 내가 그렇게 만들고 싶었다면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렸을 겁니다. 그들이 바꾸었는지 여부는.... 아룸래도 바꾸지 않았을 겁니다. 그들은 항상 자신들이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니까요. (223)
17. 나는 그림에 반사 작용이 일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반사는 감수해야만 하는 측면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바니시 등을 사용하지 않고 평평하게 그리기 때문에 유리 액자는 그림을 통합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그리고 유리가 만들어 내는 작품과 관람객 사이의 거리감도 좋아합니다. 다시 말해 나는 가능한 한 작품 주변에서 사물을 제거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렇다면 반사가 뒤죽박죽으로 얽힌 형태에 무언가를 더 보태어 준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말이군요.
이상하게도 나는 렘브란트 작품의 경우에도 유리 액자에 끼워진 것을 좋아합니다. 유리에 끼워져 있으면 보기에는 여러보로 더 힘들긴 하지만 그래도 작품을 살펴볼 수는 있습니다.
반사를 뚫고 보아야 한다는 점이 사람들로 하여금 보다 더 열심히 보게 만든다고 생각합니까? 그것이 하나의 요인입니까?
아닙니다. 핵심은 바로 거리감입니다. 그로 인해 작품이 보는 이로부터 격리됩니다. (224)
18. 당신의 작품을 소장한 개인 콜렉터들이 유리를 제거하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요즘에는 유리를 씌우지 않고 그림을 보는 것이 유행입니다. 유리를 제거하고 싶다면 그것은 물론 그들의 소관입니다. 내가 그 사람들을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죠.
당신의 작품이 개인 소장자의 집에 있는 것과 미술관에 있는 것 중 어느 편을 더 선호합니까?
나는 전혀 신경 쓰지 않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공간입니다. 따라서 그 문제는 실상 개인 소장자의 자택 공간이나 미술관의 공간에 달려 있습니다. 내 그림은 주변에 넓은 공간이 확보될 때 보다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다.(226)
19. 그럼 당신은 작품이 개인의 손에 있든 미술관에 있든 전혀 개의치 않습니까?
네, 신경 쓰지 않아요. 그 작품들은 내 손에서 떠나갔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작품도 있고 그렇지 않은 작품도 있습니다. 내 작품이 반드시 누군가의 눈에 보여야 한다든가, 감상되어야 한다는 것은 나의 걱정거리가 아닙니다. 그건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물론 누군가가 내 작품을 좋아하면 기쁩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하지 않습니다. 다른 작가들은 누가 자신의 그림을 구입하는지 그리고 그 작품이 어디로 갈지에 대해 걱정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습니다. 공적인 것에는 관심이 없고 신경도 쓰지 않아요. 그렇지만 예를 들어 사람들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을 구입하여 불태운다든가해서 작품을 파괴해 버린다면 화가 날 것입니다. (226)
20.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나를 위해서입니다. 내가 죽을 때 내 작품 중 무언가가 남아 있게 된다면 가장 좋은 이미지가 남아 있기를 바라기 때문에 화가 날 겁니다.
왜 그렇죠?
단순한 허영심 때문입니다. 사람은 결국 죽을 존재이기에 그것은 결코 사람이 알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작품이 이왕 살아남는다면 가장 좋은 작품이 남길 바랍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자신의 작품이 보여야 한다는 것에 조금은 신경을 쓴다는 얘기가 됩니다.
내가 신경을 쓴다고 할 때에는 전적으로 개인적인 관심에서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내가 만든 이미지 중 일부는 내게 일종의 잠재력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 이미지들이 살아남아야 한다는 데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정말로 논리적으로 따져 본다면 이렇게 생각하는 것조차 어리석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작품이 좋은지 나쁜지를 놓고 사는 동안 안절부절못하는 사람들은 그 답에 대해 결코 알지 못할 테고, 나 역시 그 어떤 것도 알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간만이 유일하고도 훌륭한 비평가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예를 들어 셰익스피어의 소네트에서 마지막 2행 연구는 그가 죽고 나서 한참 뒤에도 이 시구들은 여전히 읽힐 것이라고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맞습니다. (227)
21. 파괴하지 않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부자가 아닐 경우 가능하다면 정말로 몰두하고 있는 일을 통해 생활을 꾸려 나가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미술가가 자신의 의지에 따라 만들어진 그 작품이 불멸이라는 어리석은 개념과 얼마만큼 무관한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술가가 된다는 것은 허무함의 한 형태입니다. 그리고 그 허무함은 불멸이라는, 이성적으로 따져 보면 헛된 개념으로 덧칠이 될 수 있습니다. 자기가 한 일이 삶을 강하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암시하는 것 역시 헛됩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의 삶이 훌륭한 예술에 의해 강화되어 왔다는 사실을 압니다. 소수의 사람들이 남겨 놓은 훌륭한 작품들은 우리의 삶을 강화시킨 몇 가지 방식 중 하나입니다. 예술은 정말로 대단히 공허한 직업입니다.(228)
22. 그렇다면 작품을 보존할 가치가 보다 커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까?
나는 더 나은 작품을 만들기를 바랄 뿐입니다.(229)
23. 당신이 언급한 것처럼 더 나은 작품을 계속 진행하려다가 빠져들고 말았던 수렁에 대해 이제는 기술적으로 훨씬 영리해졌습니다. 이제는 헤어 나올 수 없는 그런 늪에 빠지지 않게끔 물감을 조절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그 작품을 계속해서 진척시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젊었을 때보다 우연을 통해서 훨씬 더 많은 작업을 진행합니다. 예를 들면 나는 엄청난 양의 물감을 캔버스에 던집니다. 캔버스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런 식의 작업을 전보다 훨씬 더 많이 시도합니다.
붓으로 물감을 던집니까?
아니요, 손으로 던집니다. 물감을 손에 짠 뒤에 던집니다.
당신이 헝겊을 많이 사용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지금도 많이 사용합니다. 나는 어떤 것이든 사용합니다. 붓을 문지르거나 쓸어내리는 등 화가가 사용했을 성싶은 것들은 뭐든지요. 화가들은 늘 모든 방법을 동원했습니다. 모르긴 해도 렘브란트는 매우 다양한 방식을 사용했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229)
24. 예를 들어 나는 내 그림이 우연적인 추상표현주의 그림처럼 보인다면 혐오감을 느낄 겁니다. 왜냐하면 글미을 구성하는 데 있어 매우 통제적인 방식을 사용하지는 않지만 아주 잘 통제된 그림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핵심은 내 그림의 물감이 직접적으로 보인다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작품 중 괜찮은 그림의 경우 물감이 흩뿌려진 것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직접성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마도 자만심의 발로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나는 가끔씬 그런 생각을 합니다. (233)
25.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왜냐함녀 나는 물감을 던진 뒤에 큰 스폰지와 헝겊을 집어 들고 닦아 내는 경우가 아주 빈번한데, 그것이 본질적으로 전혀 다른 종류의 형태를 남기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림의 흔적들이 필연적으로 보이는 작품이 탄생하기를 바랍니다. 나는 중앙 유럽의 대충 그린 듯한 그림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내가 추상표현주의를 정말로 싫어하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추상적이라고 것과는 별개로 나는 그 대충 그린 듯한 측면을 싫어합니다.(235)
26. 나는 요즘 '최면과 같은 상태'라는 표현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현대의 신비주의와 너무 가깝기 때문에 나는 그 용어를 혐오합니다. 또한 글너 상태를 최면과 같은 상태라고 말하는 것ㅇ느 다소 과장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말뜻을 이해합니까?
네. 사실 다소 과장된 표현이라는 것은 압니다. 그렇지만 달리 표현할 방법을 모르겠습니다.
네, 그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것은 본능에 따라 행동하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예술은 분명히 본능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본능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본능이 무엇이지 모르기 때문이죠.
그렇지만 그것은 훈련과 연습, 지식에 뿌리를 두고 있는 본능입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아이들의 미술이 본능적이란 사실을 알지만 그것은 전혀 다른 종류의 본능이고, 궁극적으로는 매우 불만족스러운 것입니다. (240)
27. 다른 사람들이 나처럼 도는 나보다 더 잘할 수 있다는 생각을 배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나는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그 경우 다를 수도 있고, 더 낫거나 혹은 더 나쁠 수도 있을 겁니다. 물론 그 사람은 물건을 던지고 나서 그 물감으로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를 모르겠지요. (241)
28. 간단히 말해 당신이 그저 그림 윙 ㅔ던진 물감 한 조각을 남기고자 한다면 그 사람이 할 수 있지만, 당신이 그것을 조정하려 든다면 분명 그 사람은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조정을 제외한다 해도 그렇습니다.
음, 우연이 그처럼 기이한 장난을 칩니다. 사람은 알 수 없는 노릇이죠. (242)
29. 우리는 전에 롤렛과 그 게임 테입르에서 종종 받게 되는 느낌, 그러니까 회전판과 장단이 맞아서 게임이 잘 풀릴 것 같은 느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이것은 그림을 그리는 과정과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나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확신합니다. 결론적으로 피카소가 일찍이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우연의 게임을 할 필요가 없다. 나는 늘 스스로 우연으로 작업을 하고 있다."(242)
30. 그것은 사람이 결코 알 수 없는 신기한 일 중 하나입니다. 내가 언젠가 룰렛에서 꽤 큰돈을 땄을 때 번호가 드러나기 전에 그 번호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던 일과 유사합니다. 그렇짐나 그런 특볋나 일이 소위 초감각적인 지각인지 또는 행운의 연속인지 여부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림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마찬가지로 나는 그것이 행운의 연속ㄴ지, 화가에게 유리하게 작동하는 본능인지, 또는 본능과 의식을 비롯한 몯느 것들이 결합되어 화가에게 유리하게 작동하는 것인지 여부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243)
31. 그것은 매우 결정적인 언급으로 들립니다. 우연은 항상 존재하고 통제도 항상 존재하며, 따라서 그 둘은 상당히 중복된다는 것이 내가 말하려던 바입니다.
맞습니다. 그 둘은 겹칩니다.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연이 제공해 주는 것은 의지에 따른 물감의 사용이 제공해 주는 것과는 상당히 다릅니다. 우연은 의지에 따른 채식이 주지 못하는 필연성을 지니는 경우가 매우 많습니다. (244)
32. 의지에 따른 채색의 경우에는 얼마간 신중해지기 때문입니까? 그것이 삽화가 의미하는 바, 즉 세심한, 이완의 결여인가요?
글쎄요, 삽화는 이미지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눈앞에 이미지를 예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이것에 대해 당신이 아는 것 이상으로 어덯게 이야기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우연이 무엇인지 모르면 우연에 대해 말하는 것이 불가능하니까요. 프랑크와 같은 사람들이 그것은 운이나 우연 또는 무엇이라 부르건 여하튼 당신이 칭하는 바가 아니라고 말할 때 나는 그들이 말하련느 바를 어느 정도는 이해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의 의미를 알지는 못합니다. 사람들이 제대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는 무의식을 설명하려고 노력하는 것과 유사하다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것은 언제나 그림에 대한 가망 없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그저 주변적인 것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을 뿐이죠. 자신의 그림을 설명할 수 있다면 본능을 설명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247)
33. 아니요, 자신의 그림은 설명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그림이든 또는 다른 어떤 그림이든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그렇지만 자신의 그림에 대한 설명에 도움을 줄 수는 있습니다.
나는 내 그림의 무엇에 대한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 특정한 형태들이 어떻게 생겨나는지 잘 모릅니다. 내가 영감을 받았다든가 재능이 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모를 뿐이에요. 나는 그 형태들을 봅니다. 아마도 미학적 관점에서 살펴보겠지요. 나는 내가 하고자 하는 바를 알긴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모릅니다. 그리고 나는 캔버스 ㅜ이에 벌어진 흔적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어떻게 이와 같은 특정한 형태로 발전되었는지를 깨닫지 못한 채 거의 처음 보듯 바라봅니다. 그런 다음에 내가 하고자 했던 것ㅇ르 기억해 내고는 그것을 향해 비이성적인 형태를 밀고 나가는 노력을 기울입니다. (247)
34. 당신의 말처럼 초기의 큐비즘에서는 언덕 위의 도시 등을 제대로 알아 볼 수 있습니다. 그것들은 그저 입방체 형태로 절단되어 있죠. 그러나 이후의 작품들을 살펴보면 피카소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바를 알았던 듯 보이지만 어떻게 구현해야 하는지는 몰랐던 것 같습니다 나는 이 점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내 경우에는 내가 원하는 바를 알긴 하지만 어떻게 만들어 내야 하는지는 모릅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우연이나 운이 나를 위해 가져다 주길 바라는 바입니다. 그러므로 작업 과정은 운이나 우연 혹은 직감과 비판적인 감각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비판적인 감각, 곧 주어진 형태 또는 우연적인 형태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얼마만큼 구체화되었는지에 대한 본능의 비판 작용에서만 그 형태를 붇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251)
35. 우연적인 형태가 당신에게 구체화되었을 때 당신은 그것을 즉각적으로 알아차립니까, 아니면 확신하는 데 몇 주 또는 수개월이 걸리나요?
작품이 순조롭게 진행되면 그것은 매우 빠르게 진행됩니다. 예르 들어 당신이 매우 좋아한다고 했던 1970년 작 오렌지색 삼면화의 중앙 패널에는 침대 위에 있는 두 인물이 등장합니다. 나는 한 침대 위에 두 인물을 함께 배치하고, 성교 또는 항문 성교를 하고 있게끔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그 이미지에 대해 갖고 있던 감각의 강도로 그림에 구현하기 위해서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나는 그저 그림을 우련에 맡겨서 이미지가 만들어지도록 시도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성행위를 하고 있는 형태로 놓인 침대 위의 두 사람에 대한 감각을 응축한 이미지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완전히 텅 빈 공간 안에 남겨졌고, 내가 항상 만드는 무계획적인 흔적에 전적으로 내맡겼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 주어진 형태에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내가 늘 분석해 보고자 했던 문제 중 하나는, 원하는 이미지가 비이성적으로 형성될 때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를 알고 있을 때보다 이미지가 신경계에 보다 강하게 와 닿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에 대한 것입니다. 왜 이성적으로 작업하는 것보다 이런 방식으로 작업할 때 외관의 실재를 보다 격렬하게 만드는 것이 가능할까요? 아마도 제작이 보다 본능적으로 이루어질 때 이미지가 더 직접적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253)
36. 그렇지만 자유롭고 본능적으로 행동할 필요성과 더불어, 당신이 말했듯이 비판적인 감각이 붙들어 줄 필요도 있습니다. 나는 모든 미술이 이해가 쉽지 않은 이 두 가지의 겷합, 곧 자유롭게 놓아주는 것과 어느 지점에서 멈추어야 하는지를 알기 위해 충분히 거리를 두는 것, 이 양자의 결합에 놓여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 경우에는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나는 아주 잘 정돈된 미술을 정말로 좋아합니다. 나이가 들면서 어떤 의미에서는 자유롭지만 보다 잘 정돈된 작품을 ㅁ나들고자 노력한다고 생각합니다. 또다시 이 문제로 되돌아옵니다. 그렇지만 당신의 언급이 이 문제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1958년에 휴스턴에서 뒤샹이 했던 아주 훌륭한 강의가 있습니다.
내가 맞혀 보겟습니다. 이것 아닙니까? "나타나는 모든 것에 대해서 미술가는 영매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그는 시간관 공간을 초웛란 미로에서 향하는 출구를 찾습니다."
뒤샹이 "영매"라는 단어를 쓰는 반면 당신은 "최면 상태"라고 말하죠. (253)
37.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큰 도움이 되지는 않습니다. 차이점이 있기 때문이죠. 뒤샹의 작품 대다수는 구상적이지만 나는 그가 구상의 상징을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보면 그는 일종의 20세기의 신화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구상의 약호라는 면에서 그렇습니다. 내가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작업은 예를 들면 초상화를 그리는 것입니다. 초상화이짐나 소위 이미지의 삽화적인 사실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작품 말입니다. 그 초상화는 대상과 다르게 제작되겟지만 외관을 제공해 줄 겁니다. 오늘날 그림의 수수께끼란 어떻게 외관이 만들어질 수 있는가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 외관이 삽화로 그려질 수도 있고 사진으로 찍힐 수도 있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그림을 그리는 수수께끼 안에서 외관의 수수께끼를 알아챌 수 있도록 외관이 만들어질 수 있을까요? 그것이 바로 창작의 비논리적인 방식입니다. 즉 바라는 바를 시도하는 비논리적인 결과를 낳을 것입니다. 나는 전적으로 비논리적인 방식을 통해 작품에 홀연히 외관을 만들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하지만 그 외관은 완벽하게 사실ㅈ거인 이미지, 즉 초상화의 경우에는 대상 인물임을 알아볼 수 있는 이미지가 될 것입니다. (255)


38.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당신은 외관에 대해 용인된 기준에 가능한 한 규제받지 않는 외관의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주 좋은 표현입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외관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거대한 문제 제기가 있습니다. 외관이 무엇인지 또는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기준은 있지만 외관이 만들어 질 수 있는 방법은 매우 불가사의하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얼마간의 우연적인 붓 자국을 통해 용인된 방식으로는 얻을 수 없는 생생함을 때면서 돌연히 외관이 등장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나는 늘 우연이나 운을 통해 외관이 존재하되 그것과는 다른 형태로부터 다시 만들어질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다른 형태라는 것이 핵심이군요.
그렇습니다. 만약 그 외관이 아무튼 성공한 듯 보인다면 그것은 우리가 모르는 다른 형택 ㅏ그 외관에 전달한 일종의 어두움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입을 모종의 방식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 말은 때때로 일어나긴 하지만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른다는 뜻입니다. 얼굴 맞은편에 머리 전체에 난 구멍인 것처럼 입을 그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초상화에 있어서 내가 꿈꾸는 이상은 소량의 물감을 집어 들고 캔버스를 향해 던지면 초상화가 거기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256)
38. 기법을 바꾸고자 노력함으로써 자신에게 철저히 어떤 제한도 두지 않았던 유일한 살마이 뒤샹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매우 성공적으로 기법을 바꾸었습니다. 전해 내려오는 기법을 사용하긴 하지만, 나는 그걸 이전에 만들어진 기법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257)
39. 왜 전혀 다른 기법이 되기를 바랍니까?
나의 감각이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하고 나의 감각에 최대한 가깝게 맞춘다면 이미지가 보다 탁월한 사실성을 지닐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하나의 완벽한 이미지를 그리는 일에 대한 집착을 갖고 있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지금도 그런가요?
아니요, 이제는 아닙니다. 나이가 들면서 보다 다양한 영역을 다루고 싶어졌습니다. 나는 더 이상 그런 생각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아마도 죽을 때까지 계속 그림을 그리고 싶기 때문일겁니다. 완전무결한 하나의 이미지를 그린다면 결코 더 이상 작업을 하지 않게 퇼 테니까요. (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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