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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제가 대변하는 대개의 그런 아이디어들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벌써 150년도 더 이전에 독일의 위대한 생리학자인 요하네스 뮐러는 그가 특수한 신경에너지의 원리라고 부른 멋진 관찰을 공식화했습니다. 이는 틀림없이 반영론자들을 혼란스럽게 만들 겁니다.
요하네스 뮐러가 무엇을 관찰했나요?
여러 가지 감각의 신경들은 항상 그에 상응하는 느낌들, 예를 들어 빛, 소리, 압력 등을 불러일으키는데 그는 이러한 일이 그런 느낌을 초래하는 자극의 물리적 속성과는 무관하게 진행된다는 점을 확인했습니다.
우리 감각이 원래 그대로의 실재를 반영하지 않는다고요?
그래요.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우리는 결코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이라고는 자극을 받은 우리의 감각이 우리 앞에 펼쳐내 보이는 것뿐입니다. 인식의 입구에서 (인식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소위 세계의 심부름꾼들은 (세계의 다양한 모습들은) 그들 자신의 특별한 속성들을 없애 버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연관하여 오늘날은 자극의 무차별적 부호화가 얘기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극 혹은 교란이 있다는 것만 알 뿐입니다. 이게 신경세포가 알려주는 전부입니다. 그러나 교란의 원인은 불분명하고 그 원인은 특수하게 부호화되어 있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시신경섬유를 식초로 자극할 경우 우리는 색이 있는 빛을 지각하게 됩니다. 혹은 미각을 느끼는 혀의 돌기를 몇 볼트의 전극봉으로 자극할 경우 우리는 식초 맛을 느끼게 됩니다. 생리학 교재에서 볼 수 있는 이러한 관찰을 통해 볼 때 외부세계가 내부세계에 베껴진다고 말하는 것은 우스꽝스럽고도 말이 되지 않는 얘기라 할 것입니다. 식초가 색의 흔적이 되고 전기가 식초가 되는 겁니다! (발명품 22)
2.
게다가 우리는 하나의 이미지가 우리에게 와서 어떤 인상을 남기는가를 결코 알지 못합니다. 일단 이미지들이 우리의 머리로 들어오면, 이후에 그것들이 어떻게 동화되고 흡수되는지는 모를밖에요. 그것들의 형태를 바꾸지만, 우리는 정확히 어떻게 변형되는지 알지 못합니다. (화가의 잔인한 손 54)
3.
이것은 물론 의식이 환상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의식의 본성은, 결과들을 받아들이되 그 원인들을 알지 못한다는 데 있다. 원인들의 질서는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연장 속의 각 신체, 사유 속의 각 관념과 각 정신은, 이 신체의 부분들, 이 관념의 부분들을 포섭하는 독특한 관계들에 의해 구성된다. 연장 속의 각 신체, 사유 속의 각 관념과 각 정신은 이 신체의 부분들, 이 관념의 부분들을 포섭하는 독특한 관계들에 의해 구성된다. 한 신체가 다른 신체를 <만날> 때, 한 관념이 다른 관념을 만날 때, 이 두 관계는 결합되어 보다 큰 능력을 갖는 하나의 전체를 이루든가, 아니면 하나가 다른 하나를 해체하여 그 부분들의 결합을 파괴하게 되든가 하는 일이 일어난다. 살아 있는 부분들의 전체는 복잡한 법칙들에 따라 결합하거나 해체된다. 따라서 원인들의 질서는 끊임없이 자연 전체를 변용시키는 관계들의 결합과 해체의 질서이다. 그러나 의식적 존재들인 우리는 이러한 구성과 해체의 결과들만을 받아들인다. 우리의 신체가 한 신체를 만나서 그것과 결합될 때, 즉 우리는 기쁨을 느끼고, 반대로 한 신체 혹은 한 관념이 우리의 고유한 결합성을 위협할 때 우리는 슬픔을 느낀다. 우리의 신체에 <일어나는 것>만을, 우리의 영혼에 <일어나는 것>만을, 즉 우리 신체에 미친 한 신체의 결과, 우리 영혼에 미친 한 관념의 결과만을 받아들이는 그러한 상황에 우리는 놓여 있다.(스피노자의 철학 34)
4.
쉽게 말해서 우리가 느끼는 감각은 외부 자극과 직접적인 상관이 없다. 외부 자극은 감각을 유발할 뿐 감각을 결정하지 않는다. 우리는 흔히 자극이 원인이고 감각이 결과인 인과적 사고에 젖어있는데, 이는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저기 내가 보는 것, 듣는 것 등등은 내가 만들어내는[산출하는/발명하는]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다. 거꾸로 알고 있다[전도몽상]. 우리는 원인들의 질서를 모른채 결과만을 받아들이는 상황에 놓여져 있다. 이를 두고 하인츠는 '단순하지 않은 기계', 마뚜라나는 '구조적 결정체'라 하고 불교에서는 '일체유심조'라 하는데, 서로를 비춰보면 풍부한 이해를 돕는다.
5.
그런데 우리가 보는 저 깃발은 나의 관찰 없이도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다. 깃발이란 실체는 없으며 내가 만드는 깃발을 결과로 받아들일 뿐이다. 하여 저 깃발의 실체없음을 두고 '환상처럼' 보라고 한다.
6.
환상처럼 보는 게 왜 이로운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무지가 우리를 곤경에 빠뜨리는 근본 이유다. 무지로 인해 전도몽상에 빠져 눈을 뜨고 꿈을 꾸는 삶을 산다. 괴롭다고 하나 괴로움의 실체가 없다. 괴로운 꿈을 꾸고 있어 꿈에서 깨면, 눈 뜨고 일어나면 말끔히 사라진다. 내가 만드는 것임을 성찰하면 대상과 주체가 따로 있는 바가 아니라 하나다. 내가 만들고 있으며 [관습 따라 말하는] 대상이란 것을 '환상처럼' 볼 때 과도한 집착을 하지 않는다. 바보가 아니라면 누가 환상에 집착하겠는가? 반면 환상이 주는 작용은 분명하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다. 연기적이다. 이 작용을 긍정하면 곧 행복이다. 날마다 새로운.
7.
다시 돌아와, 우리는 모른다. 원인들의 질서를 모른다. 허나 이 무지를 알면 무지를 통해 무지를 넘는다. 다시 말해 무지를 무지로서 볼 수 있을 때 무지는 더 이상 무지가 아니다. 무지를 벗어날 수는 없으나 [무지를 통해 무지를 본다면/환상처럼 본다면] 무지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 자유로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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