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1.
무아는 요컨대 실체로서의 내가 없다는 사상이나 무아를 체험하려면 내가 있어야한다. 그러면 무아는 모순인가? 분명하게 나는 나를 인식한다. 그러면서도 나라고 인식하는 나는 실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실체로 인식되는 나와 실체로 존재하지 않는 나 사이에서 어느 쪽으로도 떨어지지 않는 줄타기 중도가 필요하다. 무아는 실체는 없는데 작용은 있는 무엇이다. '나'는 작용의 측면에선 없는 것도 아니고 실체의 측면에선 있는 것도 아니다. 없는 것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닌 중도. 없다라고하면 틀리고 있다라고해도 틀리다.
2.
실체로 인식되는 나를 <금강경>에선 요컨대 '환상처럼보라'고 한다. 환상이란 실체는 없는데 작용은 있는 무엇이다. 주의할 것은 나라고 인식되는 내가 환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실체로 인식함으로 분명히 환상이 아니며 그러나 나는 실체로 존재하지 않으므로 환상처럼본다. 무아를 보는 방법이다. (내가 말하고자하는 건, 뜬구름잡는 것 같은 '무아'가 생활 속의 내 삶에 대체 무슨 소용인가에 도달하는 것이다.)
3.
환상처럼본다는 것은 은유가 아니다. 환상이 아닌데 환상처럼보라고 하는 게 아니다. 본다는 것은, 우리는 외부의 독립된 실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감각들이 산출해내는 상을 본다. 외부로부터 자극받은 나의 신체 변용의 관념이 정신으로, 마음으로, 느낌으로, 이미지로, 보이는 상으로 산출된다. 눈앞에 펼쳐진다. 우리는 눈앞에 펼쳐진 무엇을 실체로 인식한다. 그러나 실체로 인식되는 외부는 나의 신체와 독립되어 존재하는 그대로의 실체가 아니다. 예를 들어 내가 듣는 여자친구의 목소리는 내 신체 밖에서는 공기의 진동으로 존재할 뿐 실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의 목소리는 정확히 나의 신체가, 신경체계가 산출해 내는 것이지 외부에 독립적인 실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요컨대 실체로 존재하지 않는 무엇을 실체로 인식되는 체험을 '환상처럼 보라'고 하는 것이다. 은유가 아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환상처럼보는 것이 곧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4.
환상처럼 본다는 건 '일체유심조'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마음이 만든다'는 말을 현대적으로 바꾸면 '신경체계가 산출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흔들리는 것은 깃발이 아니라 마음이다.' 이 역시 은유가 아니다. 내 마음이 흔들려서 깃발이 흔들려보이는 게 아니다.
5.
환상이다하지 않고, 환상이 아니다도 하지 않는, 줄타기 중도, 무아가 삶에 어떻게 적용이 될까? 가령 괴로움은 환상이 아니다. 숨이 막힐 정도로 괴로움을 느낀다. 죽고싶다. 하지만 이 괴로움은 환상이 아닌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앎으로서 능히 괴로움을 건넌다.
요컨대 중도는 환상이라해도 틀리고 환상이 아니라해도 틀리다. 그러므로 환상처럼 본다.
'어떻게 살 것인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키가 작아 괴롭다 [자존감/천상천하유아독존] (0) | 2021.09.20 |
---|---|
마음의 정복 [환상처럼보기] (0) | 2021.06.25 |
실재표상과 환상처럼보기 (0) | 2021.04.06 |
소요유와 자연표류 (0) | 2021.02.21 |
대붕체험 (0) | 2021.02.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