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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명이 우리를 이해시킨다고 하나, 우리가 이해할 준비가 되지 않는다면 설명은 아무 소용이 없다. 우선 언어가 필요하다. 소에게 설명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소 귀에 경 읽기.' 정보는 설명에 의해 전달되는 것이 아니다. 정보는 아무 한테나 전달되지 않는다. 마치 암호나 외국어처럼 그것을 알고 있어야 비로소 알 수 있다. 설명은 이해를 유발할 수 있으나 결정할 순 없다.
한 사람의 이해를 유발하기 위해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설명이 계속되야한다. 어느 단계에서 즉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서 설명은 중단된다. 만족스러운 설명이 제공되고 이해가 결정되는 것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정보는 전달되는 것이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 설명하지 않고도 아는 것이 가능하다. 눈빛만 보고도 아는 사이가, 역설적으로 설명하지 않아도 설명한 상호관계가 존재한다.
내가 아무리 설명해도 모를 사람에게 설명은 무용하다. 또 고지식하게 듣지않으려는 사람에게도 무용하다. 설명이 이해로 결정되기 위해선 철저히 그 사람의 사정에 맞쳐져야한다. 말하자면 방편 만이 이해를 유발할 수 있다. 그야말로 천만방편이 필요한 것이다. 방편은 설명을 성공시킨다.
2.
나는 설명한다. 그러나 이해는 그들의 문제다. 내 소관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마땅한, 진리 같은 설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있는 게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예수의 '누가 한 쪽 뺨을 때리면 다른 쪽도 내밀어라'는 말도 사람들의 빰을 때리라는 요구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겠지요. 일정 기간 동안 늘 다른 쪽 뺨도 내밀어 주게 되면 사람들은 용기를 얻어 뺨을 때리게 되고 그러고는 처벌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니까요.(발명품 249)"
설명은 전적으로 청자에게서 결정되는 것인데, 설명을 진리나 법칙으로 삼으면, 청자의 결정 이전에 이해를 강제하는 복종이 전제된다. 만일 그림을 설명하고 그림은 이런 것이다라는 설명에 복종하면, 정작 그림에 관해 알 수가 없다. 때문에 아무 복종없이 스스로 설명을 해내는 것이 그림을 더 잘 알 수 있다.
나는 설명을 들으며 설명에 복종하지 않고 의심과 의문을 중단없이 던지면서 자신의 설명에 도달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진정 앎은 우리 스스로 배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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