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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 라마의 <마음 길들이기>와 하인츠 폰 푀르스터의 <진리는 거짓말쟁이의 발명품이다>에 나오는 대목을 서로 비춰본다.
무지와 전도몽상에서 벗어나 본래 모습을 보기위해 취해야할 자세는 "단지 그렇다고 여기는 것",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가령 내가 화났다는 사실을 아는 것으로 충분하다. 실상은 그가 나를 화나게 한 것이 아니다. 그는 나의 화를 유발할 수 있으나 결정할 수는 없다. 그로 인해 화가 났다고 확증하는 태도는 무지와 전도몽상에서 비롯되며, 때문에 부작용의 과보가 생긴다고 나는 주장한다.
1.
원인과 결과의 연기에서 핵심인 의존적 구조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면 모든 현상은 단지 이름 뿐이고, 그렇다고 여겨질 뿐, 그 이상의 어떤 것도 아니라는 점이 확실해집니다. 단지 그렇다고 여기는 것만으로 모든 현상이 본질적으로 존재한다는 생각이 약해집니다. 이를 이해하면 모든 존재와 현상의 본래 모습에 대한 불교적 관점을 이해하고자 하는 우리의 과제는 완성됩니다. 나는 내가 이 지점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는 희망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의 감각이나 마음에 무엇이 나타나든지 간에 그 대상들이 생각에 의지하여 일어난 것임을 이해한다면 모든 현상이 본질적으로 존재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현상이 본질적으로 존재한다고 여김으로써 생겨나는 온갖 문제들로부터 벗어나 있으며, 망상을 없애주는 치료제인 '공'이 무엇인지, 즉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마음 197)
2.
도대체 무엇이 당신으로 하여금 세상과 지각의 일치(상응)를 그토록 절대적으로 요구하게 만드나요? 사실 우리 눈앞에 아름다운 붉은 머릿결을 가진 소녀가, 붉은 주사위가, 혹은 붉은 식탁이 놓여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우리가 뭔가를 지각하고 있다는 사실이며 그 이상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개 우리의 감각이 세상 속의 대상들을 확증한다는 데서 출발합니다. 탁자를 보고는 가까이 다가가서 나무를 만져보고 그리고는 믿습니다. 탁자를 느낀 촉감은 탁자의 존재를 검증하며 눈이 받아들인 것을 최종적으로 검증한다고. 확증에 대한 이같은 생각은 내게는 아무 의미 없어 보입니다. 왜냐하면 마지막에 탁자로 확인되는 어떤 실재의 존재 자체는 이미 전제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 말은 검증에 대한 그러한 사고는 이미 존재론적으로 오염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왜냐하면 그런 사고는 어떤 물건이 '저기 바깥에' 실제로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으니까요.
그렇습니다. 애초에 우리가 존재 유무를 검증하고자 하는 그 어떤 것이 이미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어떻게 안다는 말입니까? 제가 즐겨 사용하는 말로 하자면, 확증하려는 사고방식을 느낌들의 상호연관에 대한 생각으로 대체해야 합니다. 우리는 뭔가를 보고 느낍니다. 그리고 우리의 느낌들의 상호연관과 신경관련 프로세스들의 총체[내가 지은 인연의 총체, 마음]가 우리가 탁자, 주사위, 아름다운 머릿결을 가진 여자 친구라고 부르는 세상을 산출하는 것입니다. 느낌들의 상호연관은 제가 볼 때 당신이 세계의 풍성한 뉘앙스라고 말한 것의 전제입니다. 느낌들은 모두 지극히 다양하기 때문에, 느낌이 있어서 보고 듣고 감촉할 수 있는 다양한 것들이 상호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지각의 풍성함이 생겨나고 우리에 의해 향유되는 세상의 멋진 화려함이 있는 것입니다. (발명품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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