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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은 선생님이 치료사가 아니라 철학의 근본 문제들에 맞서고 있는 생물학자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선생님의 성찰들이 정신요법과 개인의 변모와 연관된 분야-교육과 경영설계-에서 가장 집중적으로 받아들여져 온 게 사실입니다. 선생님의 인기와 함께 이 특별한 관심을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우선 나는 이 급작스런 인기 상승이 나에게는 그렇게 대단한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는 것을 지적해 두고 싶습니다. 칠레에 살고 있기 때문에 정말로 모든 초대에 응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당연히 가족 치료사들의 작업에 좀 더 밀접하게 익숙해지는 것이 가장 유익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칭송을 들을 때마다 나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내가 어느 정도로 이해되고 있기에 칭송을 받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만일 사람들이 어느 날 내 글들이 그렇게 열광적으로 해석되는 대단한 생각들을 내가 실제로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될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 항상 의문이 들었습니다. 많은 치료사들이 생물학에서의 내 작업이 가족을 (모든 상이한 구성원 개인들이 그들의 진술들이 서로 모순된다 할지라도 그와 동시에 옳을 수 있는) 상이한 실재들의 다원 우주로 이해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었다는 사실에 매혹당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함으로 203)

정신요법계에서 1980년대는 이론적 토론의 시기였습니다. 오늘날은 개업의들과 실용주의에 경도된 뛰어난 장인들이 다시 이 세계를 지배하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은 1981년 미국의 가정 치료사 폴델의 폭발적인 강의를 통해 즉걱적인 명성을 얻었습니다. 취리히의 한 심포지엄에서 그는 새롭게 가공된 풍미를 곁들여 자신의 새로운 교의를 청중에게 쏟아 부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선언했다고 합니다. "정보란 존재하지 않는다. 질병 그 자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진리의 인식은 불가능하다."등등. 선생님은 오늘날의 정신요법이 세계와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내 인기는 그 동안 눈에 띄게 줄어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새로운 것들을 향한 탐욕스러운 욕구에 사로잡혀 있는 문화에서는, 그리고 예상 가능한 결과들을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산출할 방법을 창출할 목적으로 모든 것의 실천적인 수행을 위해 압력을 가하는 문화에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나는 이러한 종류의 능률 지향적인 사고를 진작시키는 데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 작업은 이렇게 일원 우주적으로 기능하는 인간공학 방법이 절대로 그리고 어떠한 상황 아래에서도 달성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근본적인 불확실성의 영역에서 다른 인간과 마주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란 오직 존재의 형식을 시도하고 창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함께 약동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입니다. 언젠가 - 우리가 치료사들이라고 가정한다면 - 환자는 변모되는 것을 느낄 것이며, 외부의 도움을 받지 않고 다시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기 시작할 것입니다. (함으로 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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