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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가 볼때에 사랑과, 감정들의 힘을 다루는선생님의 성찰들은 언제나, 공정하지 못한 비약을 포함하는 것 같습니다. 자연과학의 사실들과 논증들로부터 실천 분야들에 적용되는 시적 서술들로, 거기에 무엇이 있는가 하는 특징화에서 무엇이 있어야 하는가 하는 특징화로, 인식론에서 윤리학으로 넘어가는 비약이 있습니다. 선생님은 이야기를 바꾸고 있습니다.

옳지 않습니다. 생물학은 우리에게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해주지 않습니다. 생물학자로서, 그리하여 과학자로서, 나는 누구에게도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해줄 수 없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오해일 것입니다. 사실상, 어떤 것도 좋거나 나쁘지 않습니다. 사물들은 그저 사물들일 뿐입니다. 좋다 또는 나쁘다와 같은 평가들과 구분들이 발생하는 것은, 오로지 특정한 종류의 -예컨대 우리의 특별한 선호가 걸려 있는 경우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거부하는 바로 이 인간 영역에서일 뿐입니다. 다시 한 번 말하자면, 나는 어떠한 추천도 하지 않지만, 예컨대 게놈을 조작하면 괴물들이 나타날 수 있다고 생물학자로서 주장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게놈 조작에 대한 찬성 또는 반대를 주장하고 있다는 것을 함축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단지 내가 행위의 특수한 과정에 기인하는 결과들을 서술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입니다. 그 다음에 사람들은 자신의 선택을 할 수 있겠지요.(함으로 335)

 

특정한 서술 양식이 당파적 견해와 간접적인 옹호를 포함하지 않나요?

 

아닙니다. 아마도 사람들의 수용 여부는 그들 자신의 가치들과 준거들의 영향을 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이러한 경우에,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리고 무엇이 보이고 있는지 간단히 지각하는 것은 분명 어렵습니다. (335)

 

2.

<너는 저 열매를 먹지 말라......> 불안에 사로잡힌 무지한 아담은 이 말을 금지의 표현으로 듣는다. 그러나 정작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담이 먹을 경우에 그 아담을 중독시키게 될 과일이다. 그것은 두 신체의 만남, 각각을 특징짓는 관계들이 서로 결합되지 않는 만남이다. 과일은 독처럼 작용할 것이다. 다시 말해 과일은 아담의 신체의 부분들을 (그리고 이에 평행하게 과일의 관념은 아담의 영혼의 부분들을) 그의 고유한 본질에 더 이상 상응하지 않는 새로운 관계로 들어가도록 결정할 것이다. 신은 그에게 단지 과일의 섭취가 낳을 자연적 귀결을 드러냈을 뿐인데, 아담은 원인들을 모르기 때문에 신이 자신에게 어떤 것을 도덕적으로 금지한다고 믿는다. 스피노자는 이것을 집요하게 상기시킨다. 우리가 악, 질병, 죽음의 범주 아래 집어넣고 있는 모든 현상들은 다음과 같은 형태이다: 나쁜 만남, 소화 불량, 중독, 관계의 해체.(스피노자의 철학 p38)

 

3.

 

블레이은베르흐의 예를 다시 취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나무의 열매에 대한 금지의 요체는 단지 그 열매의 섭취가 가져오게 될 치명적인 귀결에 대한, 신이 아담에게 준 계시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자연의 빛에 의해 독이 죽음을 낳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편지19). 다시 말하면 신은 아무것도 금지하지 않는다. 다만 신은, 그 열매는, 그 구성 때문에 아담의 신체를 해체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아담에게 인식시킨다. 열매는 비소처럼 작용한다. 따라서 우리는 출발점에서 스피노자의 핵심적인 논제를 발견하게 된다. 나쁜 것은 중독, 소화불량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논제가 그것이다. 심지어 그것은, 개별적 요소들을 고려한다면 배척이나 알레르기로 이해될 수도 있다. 블레이은베르흐는 이것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었다. <내가 악덕이라고 부르는 것을 당신이 삼가는 것은, 그것이 악덕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당신의 단일한 본성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어떤 음식물을 자신의 본성이 그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삼가는 것처럼, 당신은 악덕을 삼갑니다.>
(스피노자의 철학 p51)

 

 

4.

 

만일 내가 가치평가와 서술 사이의 구분을 분명하게 유지하고자 원한다면, 내가 해야 하는 것이란 가능한 한 분명하고 정확하게 주장하는 것이고 내가 의미하는 것을, 그리고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꼼꼼하게 진술하는 것입니다. 물론 내가 정당한 상대방으로서의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어떤 행위를 관찰할 때마다, 나는 넘(Num) - 새롭고 부담 없는 언어 - 을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 사람들은 아마도 나에게 내가 왜 그러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었는지 물어볼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단어와 같이, 이러한 종류의 행위에 대해, 그리고 관계들의 흐름 속에서의 이러한 자취에 대해 사용할 수 있는 공통의 개념이 있으니까 말입니다. 나는 다시 한 번 반복하고 싶습니다. 나는 무엇이건 사랑을 장려할 의향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정말로, 사랑이 없다면 사회현상들은 있을 수 없다고 강력히 주장하는 바입니다. (함으로 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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