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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

**설명에 대하여1

T1000.0 2020. 3. 2. 20:18

그런데 지난번에 당신에게 했던 질문으로 돌아가보면, 우리는 무엇이 그림을 만드는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우리로 하여금 그림을 그리도록 하는 건 무엇입니까?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보는 어떤 것을 우리의 본능으로 어떻게 창조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그것을 거의 해내지 못했지요. 우리는 언제나 닫혀 있다.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건 어떤 것을 본능적으로 창조하는 일입니다. 본능을 설명하자면, 그건 정말로 매우 복잡하죠. 수세기에 걸쳐 회화가 어떻게 변천해왔는가를 살펴볼 때, 우리가 보고 듣는 모든 것에 의해 본능이 수정되는지, 아니면 본능 그 자체는 시대에 따라 변하지 않는 것인지에 대해 당신은 자문하게 될 겁니다.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본능이란 스스로를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당신은 당신이 이미지를 만드는 방법을 설명할 수는 있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건 기술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테크닉은 변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회화의 기법에 관한 일종의 역사를 기술함으로써 그림에 관해 무언가 이야기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무엇이 그림을 만드는가에 관해서라면, 그건 늘 똑같은 이야기인데, 즉 그림의 주체, 그림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라면 당신은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아마도 나의 방식대로, 절망적으로, 나는 나의 본능을 좇아 여기저기를 다닌다는 정도일 것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작업을 설명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거부합니까?

회화에 관해서든, 혹은 시처럼 다른 예술 분야에 관해서든 설명이란 내게 불필요해 보입니다. 나는 한 편의 시를 혹은 한 장의 그림을 설명하는 게 가능하다고 믿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피카소는 그림에 대해서 매우 훌륭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는 그것에 관해 온갖 종류의 지적인 언급들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천재성을 설명하는 데는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설명이란 필연적으로 부족해 보입니다. 어쨌든 나 자신 그럴 필요를 전혀 느끼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내가 전혀 이해 못하는 어떤 것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구요. 음악을 예로 들어봅시다. 그건 우리들이 종종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주제지요. 글쎄, 그런데 나는 음악을 이해하지못합니다. 비록 그것이 내게 매우 많은 영향을 미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는 설명의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종종 설명을 요구한다는 것을 나는 압니다. 만일 사람들이 설명을 원한다면, 그것을 제공해줄 다른 사람들을 찾는 일은 언제나 가능합니다만, 그런데 그게 내겐 좀 이상해 보입니다.(잔인한 손 119)

2.

설명이 행해질 때 따르는 그런 논리적인 연역이 절대적 타당성을 갖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믿음입니다그런 확실성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전제를 이미 진리로 받아 들여야 하는데 미리 확정된 결과가 있는 문법적 놀이를 한다고 할 수 있지요. 저는 그와는 반대로 항상 이미 전제된 것들을 되묻기를 제안하는 겁니다.

인과적 설명의 (당신 표현을 빌자면) 구성된 신뢰성을 따르지 않는 삶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그런 삶은 매우 재미있고 반전이 많은 삶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매 순간 사고하는 방식과 방법을 결정하는 풍요로운 삶입니다. 어떤 전제를 받아들이거나 혹은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함께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서 우리는 모두 죽으니까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고 우렁찬 목소리로 분명히 말할 수도 있고 혹은 아직 살아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 (아직 살아 있는) 우리의 인생을 축하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전제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특별하고도 다른 어떤 세계를 위한 하나의 결정입니다. 그리고 그 다른 세계를 생겨나게 하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그러면 단선적인 인과 표상에 기반하지 않은 어떠한 사고방식이 전면에 부각될 수 있을까요?

우화, 풍자, 유추, 이야기 등을 생각해 보세요. 이것들은 암덩어리와 같이 도처에 잠입한 인과론적 사유에 의해 유감스럽게도 추방된 설명원리들입니다. 예수도 자신의 말에 강조와 권위를 부여함에 있어서 인과성에 대해서 말한 적 없습니다. 그는 시각적인 표현들로 말했고 바늘귀를 통과하지 못하는 낙타와 부자들 간의 어떤 인과적 관계도 구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유츄와 우화 그리고 이야기들을 사용했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그를 이해했습니다. 문제는 자신과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다른 형식과 가능성을 사라지게 만드는 인과론적 사유의 사회적 주입력 및 권력입니다. 사람들은 오늘날 원인과 결과의 결합을 무조건적으로 믿습니다. 그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관계들에 대한 끔찍하게도 단순한 표상으로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원인과 결과) 분석가능하지도 않고 따라서 모든 것이 인과론적 사유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놀라움, 기적, 경이롭게 보이는 사건은 늘 있습니다. (발명품 84)

3.

제일 먼저 발견해낸 것은 살아있는 존재의 연산(작동)을 설명하는데 사용될 기술적 언어였습니다. 제가 설명이라는 것을 두개의 관찰을 서로 묶어주는 의미론적 다리로 묘사했던 것을 상기해 보십시오. 설명은 언어의 한 현상입니다. 왜 개구리가 특정 장소로 팔짝 뛰어갈까?라고 물으면 개구리는 그곳에 있는 파리를 잡아먹으려고 라고 답할 겁니다. 일어난 일은 사람들이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원인에 유사한 의미론적 관계를 구성한 것입니다. 원인은 미래에, 행위는 현재에 있는 목적원인 말입니다. 개구리의 도약은 특정 목적을 이루려는 개구리의 시도로 비춰졌습니다. (발명품 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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