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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성경에 씌어 있듯이 아담과 이브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는 바람에 다른 존재로 바뀌어버렸고 다시는 처음의 무죄상태로 돌아갈 수 없었다. '타락'하기에 앞서 그들이 세계를 어떻게 인식했는가는 벌거벗은 몸을 통해 나타난다. 벌거벗고 돌아다닌 그들은 그냥 안다고 하는 무죄상태에 있었다. '타락'한 뒤 그들은 자기들이 벗었음을 알았다. 곧 그들은 자신들이 안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들의 앎을 깨달았다.

1.

앎의 앎은 확실성의 유혹에 대해 늘 깨어 있도록 우리를 얽어맨다. 또한 우리가 가진 확실성이 진리의 증거가 아님을, 누구나 다 아는 이 세계는 오직 한 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타인과 함께 산출한 어느 한 세계임을 깨닫도록 우리를 얽어맨다. 그것은 우리가 다르게 살 때만 이 세계가 변할 것이라는 것을 알도록 우리를 얽어맨다. 앎의 앎은 우리를 얽어맨다. 왜냐하면 우리가 안다는 것을 알면 더 이상 우리 자신이나 타인 앞에서 마치 우리가 모르는 것처럼 행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2.

그러므로 우리가 이 책에서 말한 모든 것에서 (우리가 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윤리가 담겨 있다. 이 윤리의 준거는 인간의 생물학적, 사회적 구조에 대한 깨달음이다. 이것은 인간의 성찰에서 출발하는 윤리이며, 또 사람다움의 본질인 성찰을 핵심적인 사회적 현상으로 간주하고 중심으로 삼는 윤리이다. 우리의 세계가 타인과 함께 산출한 세계임을 알게 되면, 타인과 다투더라도 그들과 계속 공존하고자 하는 한 우리에게 확실한 것은 (어떤 절대적인 진리를) 고집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것을 부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3.

타인과 공존하고 싶으면 그들에게 확실한 것 또한 (그것이 아무리 마땅찮게 보인다 해도) 우리 것만큼 정당하고 타당함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의 확실성이 그렇듯이 타인의 확실성 또한 한 존재영역에서 (그것이 우리에게 아무리 매력 없게 보이다 해도) 그들이 보존한 구조접속의 표현이다. 따라서 공존하려면 더 넓은 관점을 가져야만 한다. 곧 양쪽이 만나 공동의 한 세계를 내놓을 존재영역을 찾아야만 한다. 다툼이란 언제나 상호부정이다. 다툼은 양쪽이 서로 자기 것을 '확신'하는 한, 다툼이 생긴 영역에서는 결코 풀리지 않는다.


4.

다툼을 극복하려면 공존할 수 있는 다른 영역으로 옮아가야만 한다. 이 앎에 대한 앎이야말로 사람다움에 바탕을 둔 모둔 윤리의 사회적 명령이다.   
생물학적으로 보아 사람다움의 독특함이란 오직 '언어 안에 존재'함으로써 생기는 사회적 구조접속에 있을 뿐이다. 그것을 통해 한편으로 인간의 사회적 역동성에 고유한 규칙성들, 예컨대 개인의 정체와 자기의식이 산출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 삶의 재귀적인 사회적 역동성이 산출된다. 이 역동성의 일부인 성찰에 힘입어 우리는 우리가 사람다운 존재로서 가질 수 있는 세ㅖ란 타인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타인과 함께 산출하는 세계뿐임을 알게 된다.
(앎의 나무 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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