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뫎연구

언어와 자아의식

T1000.0 2020. 12. 17. 09:28

1.

이 관찰이 보여주듯이 폴 속의 좌반구사람과 우반구사람은 흔히 성찰능력과 의식을 가진 온전한 정신에 힘입어 생긴다고 간주되는 행동방식들을 해낼 수 있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언어적 성찰을 두 뇌반구로 따로따로 산출할 수 없었던 다른 환자들과 폴 사이의 차이는 언어적 재귀현상인 언어가 없으면 자기의식도 없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자기의식, 의식, 정신등은 언어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따라서 그것들 자체는 오직 사회적 영역에서만 일어난다.

나아가 폴의 사례는 더 많은 것을 깨닫게 해준다. 폴이 언어적 상호작용을 할 때는 언제나 좌반구가 우세한 듯 보였다. 예를 들어 우반구에게 글을 "웃으시오!"라고 명령하자 폴은 웃는 시늉을 지었다. 이어서 좌반구에게 "왜 웃어요?"라고 묻자 폴은 "여러분이 너무 웃겨서요."라고 했다. 우반구에게 "당신을 긇으시오!"라고 명령하자 폴은 자기를 긁었다. 좌반구에게 왜 긁느냐고 묻자 폴은 "가려워서요."라고 대답했다. 우세한 좌반구사람은 긁으라는 명령을 보지 못했는데도 자신의 경험(자기를 긁는 경험)에 걸맞을 뿐더러 이 경험과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반영하는 알맞은 대답을 쉽게 꾸며내었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거짓말은 빼고) 우리의 삶을 반영한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제3의 관찰자가 볼 때 일어나는 일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다.
(앎의 나무 259)

 

2.

이 모든 실험들은 우리가 의식이라 부르고 자기 정체와 관련시키는 성찰들의 꾸준한 흐름이 조직되고 응집성을 유지하는 근본방식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한편으로는 이른바 정신이란 것을 경험하는 데 언어가 필수적임을 보여준다. 다른 한편으로는 경험들의 흐름이란 신경계의 복합적인 작업에 따라 좌우됨을 보여준다. 관찰자인 우리는 신경계의 작업을 직접 살필 수 없지만, 그것은 생명체인 우리의 개체발생적 표류의 산물임에 틀림없다. 폴의 언어적 영역에 비응집성이란 있을 수 없다. 때문에 이 영역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성찰하라는 요구를 받았을 때, 폴이 한 대답은 이 응집성의 표현일 수밖에 없다. "여러분이 너무 웃겨요" 또는 '가려워서요"라는 그의 이야기를 통해 그의 정체와 적응이 보존된다.

폴의 사례에서 우리는 서로 다른 세 사람이 한 몸 안에서 작업적으로 교차함을 체험한다. 때에 따라 셋은 저마다 자기의식을 가지고 독립한 존재들일 수도 있다. 이것은 나 또는 자기가 언어 안에서 비로소 생긴다는 사실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나는 (나를 구분하는) 재귀적인 언어적 구분들이 몸 안에서 작업적으로 교차하여 생긴 사회적 단일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어적 상호작용의 그물체 안에서 움직이면서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재귀적 기술활동을 꾸준히 계속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언어적 작업의 응집성을 유지하고 언어의 나라에서 적응을 보존한다. (261)  

T.

'나'는 언어적 상호작용의 그물체 안에서 쌓인 오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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