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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

갈등 앞에서, 내 생각을 고집하지 않은 것은 내 생각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가진 확실성이 진리의 증거가 아님을 알고 있는 것이다.[앎의 앎] 내 생각에 집착하지 않으니 이로서 상대와 다투지 않는다. 서로 다를 뿐 .

다름이 다툼이 되지 않기위해, 공존할 수 있는 다른 영역으로 옮아가야한다. 내가 맞추든, 서로 맞추든 존중과 이해 영역으로.

만일 상대가 확실성의 유혹에 벗어나지 못할 때는.
이를 알아차리고 방책을 마련한다. 말하자면 거기에 맞춰서 지혜롭게 행동한다. 때론 맞서 싸우는 것이 윤리적 행동이 될 수도 있다. 공존을 위해.


1.

앎의 앎은 확실성의 유혹에 대해 늘 깨어 있도록 우리를 얽어맨다. 또한 우리가 가진 확실성이 진리의 증거가 아님을, 누구나 다 아는 이 세계는 오직 한 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타인과 함께 산출한 어느 한 세계임을 깨닫도록 우리를 얽어맨다. 그것은 우리가 다르게 살 때만 이 세계가 변할 것이라는 것을 알도록 우리를 얽어맨다. 앎의 앎은 우리를 얽어맨다. 왜냐하면 우리가 안다는 것을 알면 더 이상 우리 자신이나 타인 앞에서 마치 우리가 모르는 것처럼 행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책에서 말한 모든 것에서 (우리가 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윤리가 담겨 있다. 이 윤리의 준거는 인간의 생물학적, 사회적 구조에 대한 깨달음이다. 이것은 인간의 성찰에서 출발하는 윤리이며, 또 사람다움의 본질인 성찰을 핵심적인 사회적 현상으로 간주하고 중심으로 삼는 윤리이다. 우리의 세계가 타인과 함께 산출한 세계임을 알게 되면, 타인과 다투더라도 그들과 계속 공존하고자 하는 한 우리에게 확실한 것은 (어떤 절대적인 진리를) 고집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것을 부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타인과 공존하고 싶으면 그들에게 확실한 것 또한 (그것이 아무리 마땅찮게 보인다 해도) 우리 것만큼 정당하고 타당함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의 확실성이 그렇듯이 타인의 확실성 또한 한 존재영역에서 (그것이 우리에게 아무리 매력 없게 보이다 해도) 그들이 보존한 구조접속의 표현이다. 따라서 공존하려면 더 넓은 관점을 가져야만 한다. 곧 양쪽이 만나 공동의 한 세계를 내놓을 존재영역을 찾아야만 한다. 다툼이란 언제나 상호부정이다. 다툼은 양쪽이 서로 자기 것을 '확신'하는 한, 다툼이 생긴 영역에서는 결코 풀리지 않는다.
다툼을 극복하려면 공존할 수 있는 다른 영역으로 옮아가야만 한다. 이 앎에 대한 앎이야말로 사람다움에 바탕을 둔 모둔 윤리의 사회적 명령이다.   

(앎의 나무 276)

2. 공존할 수 있는 다른 영역으로 옮아가는 예 : 상대성 원리

이게 도약 지점입니다. 저는 그런 사실을 계속 설명하기 위하여 소위 상대성 원리를 말하고자 합니다. 상대성 원리에 따르면 A에게도 B에게도 옳은 하나의 가설은 그것이 A와 B에게 한꺼번에 타당할 경우에만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가령 태양이 우주의 중심인가 아니면 지구가 우주의 중심인가라는 물음을 생각해봅시다. 금성에도 지구에도 자신의 행성이 중심에 있다는 가설을 다투는 존재가 있다고 상상할 수 있을 겁니다. 지구인과 금성인이 만나게 되는 순간 그들은 다투고 전쟁을 시작하게 될 겁니다. 누가 옳은가요? 누가 진리의 소유자입니까? 이 다툼을 조정하기 위해서 상대성원리를 사용할 수 있겠지요. 우리는 지구인에게도 금성인에게도 그들이 만약 (둘 다에게 타당해야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상대성원리를 수용한다면 그들 모두 맞지 않음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상대성원리는 그러니까 옳고 그름이 아니고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이느냐 아니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것은 각자가 내려야할 결정의 문제인 것입니다. 금성인과 지구인은 이제 태양중심주의자가 되기로 그래서 태양을 우주의 중심으로 보기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런 방법으로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되며 화성인과도 평화롭게 살 수 있습니다. (발명품 40)

3.

여기에 산이 하나 있어요. 산의 서쪽에 사는 사람은 이 산을 동산(東山)이라 부르고, 산의 동쪽에 사는 사람은 서산(西山)이라고 불러요. 그럴 때 각자 부르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기에 동쪽이거나 서쪽인 것이지, 그 산이 서산이거나 동산인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 산은 동산이야’, ‘아니야, 그 산은 서산이야’라고 주장하면 이를 두고 ‘아상(我相)을 지었다’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내가 동산이라는 상을 짓고, 서산이라는 상을 지은 거예요.

어떤 사람이 ‘저 산은 내가 보기에 동산이야’ 혹은 ‘내가 보기에 서산이야’라고 한다면 우리가 들을 때 ‘아, 저 사람이 보기에는 그렇구나’ 이렇게 이해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산은 객관적으로 동산이고, 나는 그 진실을 알았다. 그런데 너는 그걸 서산이라고 하니 너는 틀렸다’

이것이 바로 상을 지은 거예요. 상을 지으면 시비가 일어나고, 다툼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럼 진실은 무엇일까요? 그 산은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닙니다.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니라는 진실은 ‘동산’ 혹은 ‘서산’이라는 상을 지은 오류를 시정해 줍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어요.

‘이 산은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니다. 그러면 이 산의 진짜 실체는 비동비서산(非東非西山)이다.’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니라는 말은 동산과 서산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깨뜨릴 수가 있었는데, 다시 이것을 갖고 ‘비동비서산이 진짜다’ 이렇게 주장하면서 이 산의 이름을 ‘비동비서산(非東非西山)’이라고 규정합니다. 진리가 비동비서(非東非西)가 된 겁니다. 그런데 누가 ‘그 산은 동산이야’라고 하면 이 사람은 어떤 생각이 들까요?

‘너는 틀렸어. 너는 아상에 집착한 거야.’

이렇게 시비가 일어납니다. 누가 서산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로 시비가 일어나요.

‘이건 서산이야.’
‘너도 틀렸어.’
‘그러면 뭔데?’
‘이건 비동비서산이야!’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내가 옳아!’라는 말과 같아요. 이 산은 동산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동산이 아니고, 서산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서산이 아니에요. 그래서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니라는 언어가 생긴 것이지, 이 산은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닌 산’이라고 이름할 수는 없어요. 비동비서산이라고 규정하는 순간 다시 시비가 생기게 됩니다.

누구는 동산이라고 하고 누구는 서산이라고 하면서 서로 ‘너는 틀렸어. 내가 옳아!’라고 하는 것이나, 동산도 서산도 아니라고 하는 사람이 ‘너희 둘 다 틀렸어. 진실은 비동비서산이야!’라고 하는 것이나, 시비는 똑같이 일어난 겁니다.

법상도 짓지 말라는 뜻은 비동비서산이라고도 고정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누가 동산이라고 하면 ‘틀렸다!’ 이렇게 접근하지 않고 ‘아, 저 사람이 이 산을 동산이라고 부르는 걸 보니 저 동네에 사는구나’ 이렇게 아는 거예요. 누가 서산이라고 하면 ‘아, 이 사람은 이 동네에 사는구나’ 이렇게 알아버리는 거예요. 옳으니 그르니, 틀렸니 맞니, 이런 시비 분별이 안 일어나고 상대의 입장과 상황을 이해해 버립니다.

‘어, 저 사람은 저 동네에서 왔구나.’
‘어, 이 사람은 이 동네에서 왔구나.’

이처럼 진리를 바로 알고 있으면 다툼이 안 일어납니다. 그런데 진리라는 상을 지으면 ‘너는 진리가 아니야!’ 이런 시비가 일어나게 돼요.

<스님의 하루 201128>


4.

갈등이 발생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합리적으로 조정된 해결책이 있을 수 있을까요?

어떠한 성공적인 갈등 해결책도 감정적인 본성에서 연유합니다. 

이것은 결코, 내가 모든 토론을 멈추고 모든 대화를 그만두자고 주장하고 있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화해를 가능케 하고 두려움들로 인한 갈등에 빠져 있는 당사자들의 마음을 풀어주는 공통의 기초를 창출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들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서로 이야기할 때, 그들은 우선 상호 신뢰와 존증을 회복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실수를 받아들이고, 사과하고, 다른 사람의 지성을 긍정하는 것이 아마도 좋을 것입니다. 

상호 신뢰가 회복된다면, 사람들은 상관적인 실재 영역에서 말해지는 것을 타당한 것으로 인정하는 방식으로 서로의 말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이러한 기초 위에서 새로운 공통적인 감정적 동학이 전개될 수 있습니다
. 관계를 지탱시킬 수 있는 동학 말입니다. 낡은 확실성들은 버려지고, 내가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일종의 행위가 회복됩니다. (함으로 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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