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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처무위지사 행불언지교 (도덕경 2장)

1.
스피노자는, 타인들이 그에게 그렇게 했던 것처럼, 그들이 살아가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는 단지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일깨우고, 보게 하려고 하였을 뿐이다. 제3의 눈으로서의 증명은 요구하거나 심지어는 설득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지 않으며, 단지 영감을 얻은 이 자유로운 전망을 위해 안경을 만들거나 안경 렌즈를 세공하려 할 뿐이다. (스피노자의 철학 27)

2.

마뚜라나 :
그렇다면 무엇이 대안일 수 있을까요? 자유의 황홀한 이점들을 사람들에게 설명하기 위해 그들을 감옥에 가두고 사슬에 묶어야만 할까요? 폭력을 거부하라고 우리가 사람들을 강제할 수 있을까요? 이러한 접근법은 결코 효과가 없을 것입니다. 내 견해는 이렇습니다. 소위 윤리적 법률과 규범들조차도 성찰의 가능성을 파괴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개인적으로 책임 있는 행동의 토대들을 제거하고 복종을 요구합니다. 더 면밀히 살펴보면 그것들은 폭정을 위한 또 하나의 표현에 불과합니다. 당신은 어떤 세계관이나 삶의 방식이 선택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습니다. 당신은 그들의 믿음과 행위들에 내재해 있는 결과들을 그들에게 제시해 줄 수 있지만, 그것은 그들에게 무엇을 하도록 강제하거나, 사물에 대한 특정한 관점을 받아들이도록, 다소 폭력적으로, 그들에게 압력을 행사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있음에서 함으로)

3.
블레이은베르흐의 예를 다시 취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나무의 열매에 대한 금지의 요체는 단지 그 열매의 섭취가 가져오게 될 치명적인 귀결에 대한, 신이 아담에게 준 계시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자연의 빛에 의해 독이 죽음을 낳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편지19). 다시 말하면 신은 아무것도 금지하지 않는다. 다만 신은, 그 열매는, 그 구성 때문에 아담의 신체를 해체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아담에게 인식시킨다.



열매는 비소처럼 작용한다. 따라서 우리는 출발점에서 스피노자의 핵심적인 논제를 발견하게 된다. 나쁜 것은 중독, 소화불량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논제가 그것이다. 심지어 그것은, 개별적 요소들을 고려한다면 배척이나 알레르기로 이해될 수도 있다. 블레이은베르흐는 이것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었다. <내가 악덕이라고 부르는 것을 당신이 삼가는 것은, 그것이 악덕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당신의 단일한 본성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어떤 음식물을 자신의 본성이 그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삼가는 것처럼, 당신은 악덕을 삼갑니다.>
(스피노자의 철학 p51)


T.
지시명령적 상호작용의 불가능.
성인들(깨달은 사람들)은 아무 것도 금지하지 않는다. 행하고 스스로 길을 걸으며 그 길을 보여준다. 여기에 어떤 강요도 복종도 집착도 간섭도 없다.
자연(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바) 그대로.
聖人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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