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전도몽상의 지점

쾌락

T1000.0 2022. 7. 17. 11:43

G. 마지막으로, 우리가 만났을 때 미셸은 매우 친절하고도 다정하게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나는 욕망이라는 단어를 참을 수가 없다. 설령 당신이 그것을 다른 의미로 사용한다고 해도 나는 '욕망=결핍' 혹은 '욕망은 억압된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미셸은 덧붙여서 "내가 쾌락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마도 당신이 욕망이라고 부르는 것일 텐데, 어쨌거나 나에게는 욕망이 아닌 다른 단어가 필요하다."고 했다.
다시 한 번 분명하게 강조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단어의 문제가 아니다. 그 까닭은 나 역시 '쾌락'이라는 단어를 참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어째서인가? 내가 말하는 욕망은 어떤 결핍도 내포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도 아니다. 그것은 작동하는, 이질적인 배치와일체를 이룬다. 그것은 감정이 아니고, 정동(정動,affect)이다. 그것은 주관성에 반하는 'haecceite(하루, 한 계절, 한 생애의 개별성)'이다. 그것은 사물이나 사람이 아닌 사건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것은 강렬도, 문턱, 그래디언트, 흐름에 의해서만 정의되는 내재성의 장 혹은 '기관없는 신체'의 구성을 의미한다. 이 기관 없는 신체는 생물학적인만큼 집학적이고 정치적이다. 배치가 만들어지고 해체되는 것도 그 위에서고, 배치의 탈영토화의 첨단점이나 탈주선들을 담고 있는 것도 이 신체다. 그것은 변이한다(중세의 기관 없는 신체는 자본주의의 그것과 같지 않다). 내가 그것을 기관 없는 신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것이 조직의 모든 지층, 유기체의 기층 뿐만아니라 권력의 조직에도 대립하기 때문이다. 내재성의 구도 혹은 내재성의 장을 파괴하는 것, 그리고 매번 기관 없는 신체를 지층화하면서 욕망에 다른 유형의 '구도'를 부과하는 것은 다름아닌 신체조직의 총체이다.
나는 쾌락에 어떤 긍정적 가치도 부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쾌락은 욕망의 내재적 과정을 중단시키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쾌락은 지층들과 조직의 편에 서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욕망이 내부적으로는 법칙에 복종적이고 외부로부터 단절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쾌락에 의해 야기되는 동일한 움직임 안에서이다. 이 두가지 경우 모두에서 욕망에 고유한 내재성의 장은 부정된다. 미셸이 사드에게 중요성을 부여했던 반면 나는 마조흐에게 중요성을 부여했던 것이 단지 우연만은 아니다. 내가 마조히스트라고 말하거나 미셸이 사디스트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것은 그럴 듯하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사실이 아니다.
마조흐가 나의 관심을 끄는 이유는 '고통' 때문이 아니라, 쾌락이 욕망의 긍정성과 내재성의 장의 구성을 중단시킨다는 생각 때문이다.(같은 방식으로, 아니 차라리 다른 방식으로 궁정식 연애에서 내재성의 장 또는 기관 없는 신체의 구성을 들 수 있는데, 이 경우 욕망에는 어떠한 결핍도 없고 욕망은 그 과정을 중단시킬 모든 쾌락들로부터 자유롭다). 내가 보기에 쾌락은 한 사람, 혹은 한 주체로 하여금 자신을 뛰어넘는 과정 속에서 '스스로를 재발견할' 수 있게 해줄 유일한 수단이다. 그것은 재영토화이다. 그리고 나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욕망과 동일한 방식으로, 결핍의 법칙 및 쾌락의 규범과 연관되어 있다.
(들뢰즈, 탈주의 공간을 위하여, 욕망과 쾌락 112)

'전도몽상의 지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교와 무신론  (0) 2021.12.13
응무소주 이생기심  (0) 2021.12.12
실재표상과 공  (0) 2021.12.12
차이의 완전성  (0) 2021.12.11
화두와 구조적 결정론  (0) 2021.12.03
댓글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