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앎의 앎

프란시스 베이컨, 메모 2-2

T1000.0 2021. 1. 20. 16:24

11.
그 공연에서 이런 일이 있었지요. 피에르 불레즈가 당시 미완의 거친 상태에 있던 그의 작품을 연주하고, 그리고 나서 장황하게 그 작품의 기원에 대해 논평을 했지요. 이 일이, 즉 한 예술가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작업 도중에 섦여할 수도 있다는 것이 당신은 놀라게 했나요?

그렇습니다. 내가 내 그림을 갖고서 그와 같은 일을 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음악을 설명할 수 있을까요? 불레즈가 그날 밤 했던 일이 나를 매우 흥분시켰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예전에 그의 작품들에 몇 곡 들은 적이 있었고, 그에 관해 씌어진 글들과 그가 손수 쓴 글들을 이미 읽었으며, 따라서 새로운 기법의 도움을 받아 그가 자신의 본능들을 녹음할 새로운 방법을 찾으려 애쓰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했지요. 그런데 바로 그 점에 관해 우리는 지난번에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예술가에게 계속 반복되는 유일한 문제는, 항상 똑같은 변하지 않는 주제를 매번 새로운 표현 형식을 찾아서 표현하는 일입니다. (125)

12.
당신이 경험하는 감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소위 본능입니다. 본능이란 어떤 거라고 당신은 생각합니까?

본능이라구요? 모르겠는데요. 분명히 그게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은 틀림없습니다. 만일 당신이 당신의 본능에 가능한 한 가까이 근접해서 무언가를 했다면 당신은 성공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경우는 참으로 예외적인 일에 속합니다. 그런 일은 매우 드물게 일어나죠.(126)

13.[본능적으로 그리는 사건]
당신의 어떤 작품들이 그것ㅇ르 성취했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마도 1946년에 제작된 <회화>의 첫번째 판에서, 나는 풍경화를 그리고 있었는데 새 한 마리가 날고 있는 들판을 만들고 싶었지요. 캔버스 위에 한 무더기의 참고 자국들을 찍어놓았는데, 그러자 갑자기 당신이 지금 그 캔버스 위에서 보는 것과 같은 형태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더니 그것들이 나를 압도해버렸지요. 그건 내가 애당초 계획했던 게 아니었어요. 그것과는 함참 거리가 멀지요. 그렇게 일이 벌어졌을 뿐, 나 또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알고 꽤 놀라워했지요. 이 경우엔 본능이 그러한 형태들을 연출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건 영감과 같은 것은 아닙니다. 그건 뮤즈라든가, 혹은 그 비슷한 어떤 것들과도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건 아니지요. 그건 정말 하나의 사건처럼 예기치 않게 일어났지요. 나는 한 가지 일에 착수했는데, 완전히 당혹스러운 방법으로 그것과는 아주 다른 어떤 일이 벌어졌지요. 그것은 우연적이며 또한 동시에 매우 명백한 일입니다. 그것이 내가 말하는 본능이지요. 그러나 나는 당신에게 그것을 정의해줄 수도 없고, 단지 어느 날 어떻게 그러한 일들이 일어났는지를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게 전부지요. (127)

14.
당신은 '사건'이란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당신이 즐겨 사용하는 말이지요. 당신에게 그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더 정확하게 말해줄 수 있나요?

그걸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난 당신이 우연한 사건이란 어떤 것인지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것은 현실의 여러 다양한 형태들을 모두 망라하는 말이지요.
[마음은 내가 지은 인연의 총체의 드러남이라고 할 때, 내게 마음은 사건과 같은 말이다.]
예를 들어서 당신이 유화 물감을 사용하고 있을 때, 당신이 통제할 수 없는 결과가 생길 수도 있지요. 당신은 물감 한 방울을 묻혀서 붓을 이 방향으로 혹은 저 방향으로 움직일 수가 있고, 그래서 그게 매번 다른 결과를 낳아 전체 이미지의 의미가 변할 수도 있습니다. 당신이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작업하고 있는 동안에 당신은 그 방향으로 더 멀리 나아가려 하고, 그리하여 당신이 예전에 만들었던 이미지를 파괴하는 때가 오기도 합니다. 그 이미지를 당신은 결코 되찾을 수 없지요. 그건 또한 미처 예기치 못한 어떤 것이 갑자기 나타나는 때이기도 하지요. 예고 없이 그것이 당신을 찾아옵니다. 우리는 압니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우리는 알지만, 그림은 매우 유동적이어서 우리는 어떤 것도 기록해둘 수가 없지요. 가장 놀라운 일은 이렇게 거으 ㅣ무심코 나타난 무언가가 당신이 하고 있던 작업보다 때때로 더 훌륭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항상 그런 일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종종 엣날에 그렸던 그림들로 돌아가 작업을 계속면서, 완성되었을 때보다 시작했을 때가 훨씬 더 좋았던 작품들을 나는 파괴해왔습니다.(128)

15.
시작할 때 당신은 자신이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지 모르고 그리고 심지어 어디서 끝마무리를 할지조차 모른다는 뜻입니까?

아니오,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캔버스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할 때 나는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가에 대한 어떤 아이디어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림을 그리는 동안 문득 그림 그 자체와는 상관없이 바깥에서,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이러저러한 형태들과 방향들이 어찌어찌하여 그냥 나타납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사건'이라 부르는 것이지요.(129)
[사건적 글쓰기, 글을 쓰다보면 생각지도 못한 통찰을 얻을 때가 있다. 득템 사건]

그런 것을 무의식의 사건들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정확히 그렇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단어는 우리에게 지나치게 정신분석을 연상시키기 때문이죠. 그리고 나는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사건들이 내가 앞서 말한 사건과 완전히 똑같은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어떤 관점에서 볼 때, 프로이트가 의미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르지요. (129)

16.
당신은 그림이 우연히 생견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그보단 더 복잡하지요. 캔버스 위에 마지막으로 나타나는 것은, 일이 잘 풀리나면, 아마도 화가가 원했던 것과 우리가 방금 전에 이야기했던 그 사건들의 혼합물일 것입니다. 회화에서, 그리고 또한 아마도 다른 예술에서도 통제의 요소와 뜻밖의 요소가 늘 공존하고 있으며, 그러한 구분은 아마도 의식과 무의식이라고 정신분석학에서 정의했던 것으로 돌아가는 듯합니다.(130)
[작품이란 혼합물, 즉 화가가 원했던 것과 우리가 방금 전에 이야기했던 그 사건들의 혼합물일 것입니다.]

17.
나는 오랫동안 정신 치료를 받아온 사람들을 몇 명 알고 있습니다. 구 년이 지난 뒤에도 그들은 실제로 변하지는 않았더군요. 그렇지만 혹시 그들이 변했다면 훨씬 더 좋았을 겁니다. 그리고 그게 바로 그들이 치료를 시작한 이유이기도 하지요. 어떤 경우라도 그것은 성공하지 못했지요. 그러나 모든 정신분석하깅 반드시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확실히 그런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분명히 프로이트는 그를 보러 온 사람들을 치료하길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성공했는지 여부는 모릅니다만,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정신분석과 고백을 혼동하고 있는 게 문제라는 인상을 나는 받았습니다. 그들은 마치 그들의 양심을 지켜주는 사람을 보러 가기라도 하듯 정신분석학자를 찾아가고, 그래서 분석이 차라리 하나의 종교처럼 되는 거지요. 그건 교회에 가는 일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당시니도 알다시피 사람들은 그들 자신과 그들의 소소한 문제들에 관해 이야기하길 좋아하지요. 나는 내가 그러한 종류의 일에 특별히 사로잡혀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132)

18.
나는 정말로 프로이트가 사물을 설명하는 방식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정신분석학에는 매우 흥미로운 아이디어들이 꽤 있습니다.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고전적인 구분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것이 회화에 관해 내가 생각하는 바를 모두 다루지는 않지만, 이성적인 언어로 설명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위해 형이상학적인 설명에 기대지 않아도 되는 이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알 수 없는 세계는 신비의 영역이나 혹은 그와 유사한 어떤 것에 귀속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러한 종류의 모든 설명들을 혐오하므로 그 사실은 내게 매우 중요합니다. 당신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 점입니다. 내가 사건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그토록 오랫동안 예술가들이 갖고 있다고 믿었던 어떤 종류의 영감과도 관계가 없습니다. 없고 말고요. 그것은 작품 그 자체로부터 나온 어떤 것이며, 뜻밖에 문득 나타나는 어떤 것입니다. 결국 회화란 그러한 사건들과 미술가의 의지 사이의 상호 작용, 혹은 당신이 좋아하는 표현대로 무의식과 의식의 상호 작용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당신도 알다시피, 당신이 사물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것들은 충분히 명확해 보이지만, 당신이 캔버스 위에서 작업할 때 상황은 결코 그와 똑같지는 않지요. 그때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혹은 무엇보다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당신은 알지 못합니다. 당신은 안게 속에 갇힌 셈이지요. (133)

19.
안개라구요?

네. 일할 때 나는 모호한 하나의 아이디어를 갖고 있을 뿐이며, 종종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에 대해 전혀 생각이 없을 때도 있지요. 캔버스 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는 어떤 면에서 순전히 우연에 달려 있지요. 물론 나는 어떤 한 가지에서 시작하지만, 대개 그것은 최초의 아이디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지요.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내가 일종의 유별난 자기 훈련을 하고 있다는 것도 또한 사실입니다. 회화란 단순히 캔버스 위에 물감을 뿌리는 것만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므로, 그건 일종의 자산일 테지요. 화폭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할 때 나는 마스터 플랜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나이가 들수록, 일종의 능력에 해당하는 숙련된 기술이 생기지요. 어렸을 때에 비해 지금 나는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분명히 더 많이 의식하고 있는데, 그게 항상 그리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실이 그러하므로 결국 내 그림을 구성하는 것은 이러한 열정과 예기치 못한 것과의 혼합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지금 나는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의 초상화를 그리고 싶은데, 어떻게 접근해야 좋을지 도무지 알 수가 없군요. 그게 언제나 내게 문제였습니다. 그걸 어떻게 해야 할지 나는 알지 못할 것이다, 라고 늘 생각하지요. 그러자 나의 작품과 그림 그리는 행위, 사건 사이의 그 우연한 만남이 이루어지고, 그리고 나서 그림이 떠오르는 겁니다. 난 여태 그것에 만족한 적이 거의 없지만, 그러나 때때로 사건과 의지의 행복한 결합이 이루어질 때가 있지요. 그건 즐거운 일이지요. (135)

20.
어떤 면에서 일종의 신비로운 연금술이라 할 만한가요?

아닙니다. 그건 사실 화학에 더 가깝습니다. 실재들이 새로운 실재를 만들기 위해 혼합된 자연스런 현상이지요. 만일 신비라는 말이 이 세계의 밖에 존재하는 무언가를 의미한다면, 거기에 신비는 없습니다. 회화에 관해 말하자면 모든 것은 바로 우리의 눈앞에서 일어납니다. 미술가의 작업식은 현자의 돌을, 즉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을 탐구하는 연금술사의 서재가 아니며, 그보다는 아마도 우리로 하여금 어떤 예상치 못한 현상이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그만두지 못하게 하는, 화학자의 실험실에 더 가까울 것입니다. 사실은 정반대인 거죠.(136)

21.
여전히 당신은 형이상학에 관한 모든 개념을 거부하나요?

네, 그렇습니다. (136)6


'앎의 앎'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발할 뿐 결정할 수 없음의 예  (0) 2021.01.20
프란시스 베이컨, 메모 2-3  (0) 2021.01.20
무상  (0) 2021.01.19
프란시스 베이컨, 메모 2-1  (0) 2021.01.19
도의 묘함  (0) 2021.01.12
댓글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