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상황이 그렇게까지 나쁜 것은 아니었답니다. 나는 첫 논문을 하인쯔 폰 푀르스테르에게 직접 보냈고, 그의 도움으로 그 논문은 1975년 <바이오시스템즈>지에 실려 간행되었습니다. 분명 몰이해의 국면이 있었지만 그것이 나에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습니다. 자기 생산에 대하여 처음으로 '생물학 협회'에서 강연을 하고 내 생각을 상세하게 제시했을 때, 한 친구가 나중에 내게로 와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마뚜라나, 뭐가 문제야? 어디 아파? 수많은 과학자들이 내가 제시한 것에 어떠한 직접적인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정말 솔직히 말하자면, 나한테는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내 작업에 대한 비판적 논평들은 언제라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다양한 반대들과 주장들이 타당하지 않다는 것을 언제나 증명할 수 있었으니까 말입니다. 예를 들어, 어느 날 동료 하나가 나에게 우주의 다른 일부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생명체계들과 완전히 다른) 생명체계들이 있을 수도 있지 않는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그에게 물었습니다. "만일 그것5들이 완전히 다르다면 우리가 생명체계들을 다루고 있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내 주제는 살아 있는 모든 것에 공통적인 것과 관계가 있네." 이것은 그저 학자적 현학이 이니라 인식론적으로 확고한 주장입니다. (함으로 299)
정상과학의 현재의 패러다임은 의심할 바 없이 실재의 패러다임입니다. 과학적 커뮤니티의 대다수가 (우리가 단계적으로 그것의 본질적 특징들을 발견해 갈 수 있는) '관찰자와 독립적인' 세계를 믿고 있습니다. 이러한 패러다임은 종종 - 철학자 요제프 미테레르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 패러도그마의 형상과 견고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과학사는 환영받지 못한견해들이 어떻게 비과학적인 것으로 분류되는지, 그 견해들의 주창자들이 어떻게 과소평가되거나 쉽사리 무시되는지, 많은 사례들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배제의 관례들이 종종 선생님에게 행사되었을 때, 그것들에 대해 전혀 걱정하지 않았나요?
아닙니다. 나는 내 자신을 (과학적 탐구의 특수한 패러다임에 맞서 싸워야 하는) 혁명적 과학자나 어떤 신세대 이론의 주창자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은 나와 상관이 없었습니다. 나는 인정받는다거나 팬들이 엄철 따르기를 동경한 적이 결코 없습니다. 내 작업이 정당하게 이해되지 못하거나 홀대를 받았을 때 결코 불안하거나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종류의 역사는 나에게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독재의 시절을 통과한, 확신을 갖고 주의 깊게 논리적 오류 없이 완벽한 작업을 이루어 내려 했던, 완고한 과학자였고 지금도 그러합니다. 그게 답니다! (함으로 300)
'마뚜라나 <있음에서 함으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과학과 철학의 분리 이전 (0) | 2020.04.02 |
---|---|
칭찬과 비난에도 흔들리는 않는 자문하기 (0) | 2020.04.02 |
적과의 동침의 전복 (0) | 2020.04.01 |
인지생물학 강의 (0) | 2020.04.01 |
독재와 떡고물 (0) | 2020.04.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