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다고 해도 틀리고 없다고 해도 틀리다.
저도 모르지요. 그저 다른 말을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우리가 실재라고 부르는, 실재라고 생각하는) 놀이를 같이 하도록 다른 사람을 초대하려는 시도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의 바람은 내 말을 (나의 언어를) 잘 구사해서 정치가 됐건, 과학, 시 혹은 무엇이 됐건 모든 대화 속에 나의 윤리가 내재되도록 하는 것, 그래서 내가 어떤 문장을 말하더라도 늘 점잖은 사람으로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어떤 것도 강요하려 하지 않는 사람, 자신을 재판관이나 경찰과 같은 지위로 끌어 올리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각자의 여지를 부여하는 그런 점잖은 사람 말입니다. 이게 제가 궁긍적으로 올바른 언어와 설명형식을 말하기 위한 어떠한 범주도 어떠한 목록표도 언급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진리는 거짓말쟁이의 발명품이..
자, 우리는 의심의 여지없이 여래를 보고 있다. 허나 여래는, 여러분은 나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하여 여래는, 본다는 이 분명한 체험을 '환상처럼 보라'고 한다. 분명하니 물론 환상이 아니고, 나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니 환상이 아닌 것도 아니다. 환상이 아니며 환상이 아닌 것도 아닌, 중도. 선사들은 말한다. 환상이라해도 몽둥이 30방, 환상이 아니라해도 30방이다. 본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해서 깨닫기가 어렵다. 3. 만약 색신으로써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써 나를 구하면 이 사람은 사도(邪道)를 행함이라, 능히 여래를 보지 못하리라.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4. 일체유위법은 꿈처럼 환상처럼 물거품처럼 그림자처럼 이슬처럼 또한 번개처럼 응당 이와같이 관할지니라. (..
내가 보기에 옳다. 하지만 오직 모를 뿐.
스피노자식으로 말하면, 실재성과 완전성은 동일하다. 우리는 신체의 변용이 작은 완전성에서 큰 완전성으로 이행은 기쁨을, 큰 완전성에서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은 슬픔을 느낀다. 주목할 것은 작은 완전성은 불완전한, 비정상인 것이 아니라 그것은 그것일 뿐이다. 작다고 하나 작다가 아니므로 그 이름이 작다이다. 물론 사람들은 기쁨을 추구하지 슬픔을 원하진 않는다. 이런 맥락에서 불교의 지장보살은 반대로 작은 완전성을 선택한다. 왜냐하면 중생들이 작은 완전성으로 괴로워하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그가 알려진대로 지옥을 기꺼이 선택할 수 있는 이유, 하나는 그것은 그것일 뿐임을 알기에 두려워하지 않으며, 또 하나는 그가 중생과 함께하는데 기쁨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작은 완전성으로의 이행에도 슬퍼하지 않는다. 무의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