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관찰자에게 행위의 언어적 조정은 구분, 곧 언어적 구분으로 나타난다. 구분은 언어적 영역에서 작업하는 이의 언어적 환경에 있는 객체들을 기술한다. 따라서 언어적 영역에서 작업하는 관찰자란 기술의 영역에서 작업하는 셈이다. 그밖에 언어란 언어적 상호작용들의 재귀과정을 통해, 곧 행위의 언어적 조정의 언어적 조정을 통해 생기는 현상이다. 때문에 언어적 영역은 행위의 언어적 조정이 일어나는 환경의 일부가 되며, 언어는 관찰자에게 기술의 기술이 행해지는 영역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관찰자가 하는 일은 정확히 말해 다음과 같다. 관찰자는 언어적 구분들을 언어적으로 구분한다. 또는 다른 관찰자가 말한다면 개체발생 속에서 기술의 기술을 산출한다. 따라서 관찰이란 공동개체발생 속에서 행하는 기술의 기술로서 언어와 ..
여기서 우리느 단세포생물의 ㅅ행동에서 관찰할 수 있었던 것과 모든 면에서 똑같은 상황을 마주하고 있다. 감각부위(이 경우에는 감각세포들)와 운동부위(이 경우에는 붐ㄴ비세포들과 근세포들) 그리고 둘을 잇는 경로(생경그뭋체)가 있다. 히드라의 모든 해옫ㅇ(먹이섭취, 도피, 생식 등)은 이 두 부위(감각부위와 운동부위)가 중간뉴런들의 그물(신경계)을 통해 역동적으로 당양하게 연결된 결과다. (앎의 나무 175) 뮤런들의 체게는 이처럼 갖가지 세포들과 다양하게 연결된 채 유기체 안에 묻혀있다. 감각부위와 운동부위가 매우 정밀하게 상호작용할 수 있도록 그 사이를 이어주는 뉴런들이 그물처럼 얽힌 것을 가리켜 신경계라 부르낟. (179) 그러나 다시 한 번 강조하겠다. 이렇게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복잡한 인간의 신경..
1. 신호, 설명, 생각 혹은 이념을 이해한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이해나 의미를 체험한다는 것은 어떻게 기술될 수 있을까요? 당신의 질문이 갖춘 논리는 특별하군요. 당신은 이해를 이해하고자 합니다. 당신 자신의 회귀성(이해를 이해하려는 태도)에 대해서 회귀적으로(이해를 이해하려는 태도를 이해하려고) 묻고 있습니다. 당신이 듣고자 하는 것은 제가, 앞에서 이미 말한 대로, 두 가지 기술(서술)간의 의미론적 연관에 다름 아닌 것으로 여기는 '설명'입니다. 무슨 얘기를 하시려고 하는 거죠? 이해를 체험한다는 것을 신경생리학적인 혹은 시적인 관점으로부터 특징지을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짧은 일화로 답을 해 보겠습니다. 이 예를 해석하자면, 이해와 파악은 어떤 사람이 자신이 속한 문화나 유산에 기반하..
2차 수준의 개념이 당신이 선택한 예에서는 부정으로부터 설명됩니다. 부정의 관점으로부터 '우리는 우리가 보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지 않는다'라고 하는 (부정의) 자기적용의 문제가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지요. 전적으로 옳습니다. 물론 긍정으로부터 설명을 찾을 수도 있겠지요. 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에서의 목적 혹은 목표 개념을 생각해 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럴 경우 2차 수준의 관점으로부터 제기되는 물음은 '목적의 목적은 무엇인가?' '목표의 목표는 무엇인가?' '왜 도대체 목적에 대한 생각이 도입되는가?' 등이 되겠지요. 제가 비행기를 타고 갈 때에 저는 늘 제 주변에 앉은 사람들을 관찰하고 그들이 신발 끈을 어떻게 묶었는지를 살펴봅니다. 비행기가 출발하면 그들은 신발을 벗었다가 목적지에 가까워지면 그들은 다시..
0. 2차 수준의 순환성인 자기순환을 통해 우리는 관찰이 관찰자를 필요로 한다는데 주목하고 나아가 관찰자가 관찰의 원천임을 성찰한다. 이는 나에게 불교의 '일체유심조'의 과학적 이해, 혹은 설명처럼 이해를 돕니다. 1. 그런 생각을 하는 재능 있는 사람들의 오류는 뇌를 이해하기 위한 더 나은 모델을 개발하고 있다고 믿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된 것은 뇌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리고 뇌에 대한 모델을 개발하기 위해서 뇌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원래 우리는 뇌를 파악하기 위해서 스스로를 설명하고 스스로를 이해해야 합니다. 제가 말하는 이론의 구조는 스스로를 기술해야 한다는 요구를 충족시켜야 합니다. 이것은 상징화시켜서 말하자면 자신의 꼬리를 물고 있는 뱀인 우로보로스와 같습니다. 여기서도 순..
1. 여러분은 자식에게 하루 종일 일하는 파출부 자리나, 공사장에 가서 일하는 막노동 자리를 구해 달라고 기도하지는 않죠? 그런데 복권을 사면 갓바위 가서 기도하고 싶어합니다. 이렇게 기도의 심리라는 것은 우리들의 허황한 마음하고 늘 결합돼 있습니다. 2. 브라만이 신에게 기도하면 뭐든지 이루어진다고 가르쳤는데, 부처님은 그런 것을 비판하셨어요. 그게 허황한 것이고 어리석은 것이라고 말씀하셨거든요.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아, 이거 내가 어리석었구나, 고가 이런 것에서 발생하는구나.'라고 자각해야 합니다. 부처님은 괴로움에서 벗어나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열반의 길을 여셨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이 허황한 것을 도리어 승려가 부추기고, 또 대중은 그 허황한 생각대로 자꾸 요구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