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무엇인가? - 탁자이다 - 이것이 탁자라는 걸 당신은 어떻게 아는가? - 나는 그것을 보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탁자라는 걸 안다. - 그럼 당신은 어떻게 그것을 볼 수 있는가? - 나는 그것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볼 수 있으며, 나는 거기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1. 이 논증은 선험적인 설명적 원리 위에 서 있다. 이 원리는 어떤 것이 구별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관찰자와 독립적이기 때문이고, 그것이 관찰자와 독립적인 것은 그것이 실재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더욱이 이러한 논법은 나의 외부에 내가 '하는' 것의 토대인 독립적인 실재가 존재한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용인하는 것 위에 서 있다. 여기에는 이러한 진술을 타당하게 하는 추론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형이상학적 태도에서..
빅토르 프랑클은 강제수용소에서의 끔찍한 경험에도 불구하고 집단죄의식에 대한 생각을 항상 단호하게 거부하고 비판했지요. 저는 그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집단이라는 걸 저는 알지 못합니다. 집단이 어디에 있나요? 집단과 악수하고 포옹하고 같이 앉아서 어떻게 지내냐고, 어디 아프지는 않은지, 왜 웃고 왜 웃는진 물어 볼 수 있나요? 집단이라는 말은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를 방해하는 그런 개념일 뿐입니다. 집단이라는 개념을 개인으로부터 추상화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나요? 사람은 자유롭습니다. 그리고 집단 혹은 어떤 외적 폭력의 희생물이 아닙니다. 사람은 제가 볼 때 그 자체로 하나의 우주입니다. 제 견해로는 뭔가를 추종하고 자기를 거기에 복종시키는 사람 조차도 그렇게 하게끔 스스로 결정을 내린 개인입니다. 한 때..
2차 수준의 개념을 예를 들어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맹점에 대한 실험을 생각해 봅시다. 한쪽 눈을 별에 고정시킵니다. 그래도 검은 점은 보입니다. 그러나 눈으로부터 일정 정도 멀어지면 검은 점은 사라집니다.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지요.생리학적 설명에 따르면, 검은 점은 일정한 거리에서 망막의 특정 지점에 맺히는데 그곳에는 신경세포가 없고 그 지점은 시신경이 모여서 눈을 떠나는 곳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리학적 논의를 가지고서도 아직 설명하지 못하는 것은 왜 사람들은 맹점을 보지 않는가? 그리고 왜 우리는 맹점의 존재에 대해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하는가?하는 질문입니다. 시야(보이는 영역)는 우리에게 항상 닫혀있는 것(폐쇄된 것)으로 나타납니다. (볼 수 있는 것만 보니까) 볼 수 없는 곳이 없는 듯이 나..
내 친구인 고든 패스크가 한번은 그런 상황을 표현하는 아주 멋진 그림을 그렸습니다. 한 사람이 스스로 홀로 있다고 주장하는 중절모를 쓴 어떤 사람을 봅니다. 그리고 그 중절모를 쓴 사람은 마찬가지로 중절모를 쓰고 있는 또 다른 사람을 머리속에 떠 올리는데 그 사람 역시도 자기가 상상하는 다른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자신의 상상력의 구성물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의 생각속에서는 다음과 같은 경우가 생겨날 수 있습니다. 유아론적으로 사고하는 한 사람이 마찬가지의 견해를 갖고 있는 다른 사람을 만난다. 누가 옳은가, 첫 번째 유아론자인가 아니면 두 번째 유아론자인가 하는 물음이 제기되는군요. 이게 도약 지점입니다. 저는 그런 사실을 계속 설명하기 위하여 소위 상대성 원리를 말하고자 합니다. ..
저를 어떻게든 특정한 범주에 넣으려는 당신의 시도와 당신이 사용하는 그러한 인식론적 어휘들은 나 자신을 상당히 불행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내게 보여준 그런 입장에서는 존재론이라는 (실제적으로 존재하는 것에 대한 가르침이라는) 끔찍한 사고방식에 다시 들어가게 하는 뒷문이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입장을 따를 경우 우리는 또다시 외부세계의 존재에 대해서 얘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외부세계와 주어진 것에 기댐으로써 각자의 책임이라는 것이 제거됩니다. 이 점이 존재론의 아주 끔찍한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아무런 죄가 없어 보이는 '뭐가 있다'라는 공식을 도입하는데 이는 제가 농담 삼아 그리고 다소 불쾌하게 '외적으로 존재하는 연산자'라고 불렸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강압적으로 말합니다. '그게 이..
맞습니다. 저에게는 누가 결국에 옳으냐 하는 끔찍한 질문이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편협함(불관용)과 싸움만이 지배하는 그런 논의에 저는 관심이 없습니다. 저는 다른 생각(사고)을 논박하고 싶어하는, 그래서 다른 사람을 물어뜯고는 결국에 똑같은 사람이 되고 마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다만 다른 관점을 변호하고 싶고, 우리가 로렌츠의 문장들을 뒤집을 수 있고, 말해진 모든 것을 거꾸로 세울 수 있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이게 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예를 들어 우리 스스로를 우리들의 세계를 발명하는 사람 혹은 산출하는 사람으로 이해한다면 그때 적응의 문제는 전혀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겁니다. 그런 문제는 사라지는 것이지요. 우리가 발명할 수 없고, 우리에게 맞지 않는 것을 어떻게 발명하겠..
1. 그러한 우리의 능력을 보여줌으로써 유기체 내부에 베껴지는 어떤 외적 질서를 상정하지 않고서도 우리의 안정적인 인상들이나 지각들을 정당화시킬 수가 있군요. 옳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제가 사용하는 산출해냄Errechnen이라는 개념으로 다시 한 번 되돌아가고 싶군요. 그 개념은 'Er-'라는 마술적인 전철을 갖고 있는데 이 전철은 적극적인 과정과 창조의 모멘트를 암시합니다. 아직 없는 어떤 것이 창출됨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현실을 'er-finden'(발명하다), 'er-rexhnen'(산출하다), 'er-kennen'(인식하다)라고 말할 경우, 이때는 이미 있는 것을 수동적으로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어떤 창조적이고 활기찬 과정들이 문제가 됩니다. 뭔가가 산출되고 발명되는 것이지 발견되고 드러내..
1. 도대체 그게 맞는 말입니까? 현실세계와 지각된 세계간의 상호결합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요. 색을 지각하는 문제로 되돌아가 보더라도 붉은색이라는 것이 대상의 속성이 아니라 관찰자의 눈에 생기는 인상임은 당연히 맞긴 하지만 의식에게 빨간색이 하나의 색으로 다가오는데 이유가 되는 객체 자체의 특수한 구조가 역시 있어야 한다는 것도 맞지 않습니까? 저는 오히려 거꾸로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에게 붉은 것으로 나타나는 어떤 대상이 있다고요. 그러면 이러한 색에 대한 인상은 어떻게 설명되어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제기 되지요. 어떤 가정이 여기서 발견됩니까? 빨갛게 칠해진 대상이 바깥 세상에 존재한다고, 그리고 저의 지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다름 아니라 붉게 칠해졌다는 사실이라고 저에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