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인 고든 패스크가 한번은 그런 상황을 표현하는 아주 멋진 그림을 그렸습니다. 한 사람이 스스로 홀로 있다고 주장하는 중절모를 쓴 어떤 사람을 봅니다. 그리고 그 중절모를 쓴 사람은 마찬가지로 중절모를 쓰고 있는 또 다른 사람을 머리속에 떠 올리는데 그 사람 역시도 자기가 상상하는 다른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자신의 상상력의 구성물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의 생각속에서는 다음과 같은 경우가 생겨날 수 있습니다. 유아론적으로 사고하는 한 사람이 마찬가지의 견해를 갖고 있는 다른 사람을 만난다. 누가 옳은가, 첫 번째 유아론자인가 아니면 두 번째 유아론자인가 하는 물음이 제기되는군요. 이게 도약 지점입니다. 저는 그런 사실을 계속 설명하기 위하여 소위 상대성 원리를 말하고자 합니다. ..
저를 어떻게든 특정한 범주에 넣으려는 당신의 시도와 당신이 사용하는 그러한 인식론적 어휘들은 나 자신을 상당히 불행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내게 보여준 그런 입장에서는 존재론이라는 (실제적으로 존재하는 것에 대한 가르침이라는) 끔찍한 사고방식에 다시 들어가게 하는 뒷문이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입장을 따를 경우 우리는 또다시 외부세계의 존재에 대해서 얘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외부세계와 주어진 것에 기댐으로써 각자의 책임이라는 것이 제거됩니다. 이 점이 존재론의 아주 끔찍한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아무런 죄가 없어 보이는 '뭐가 있다'라는 공식을 도입하는데 이는 제가 농담 삼아 그리고 다소 불쾌하게 '외적으로 존재하는 연산자'라고 불렸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강압적으로 말합니다. '그게 이..
맞습니다. 저에게는 누가 결국에 옳으냐 하는 끔찍한 질문이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편협함(불관용)과 싸움만이 지배하는 그런 논의에 저는 관심이 없습니다. 저는 다른 생각(사고)을 논박하고 싶어하는, 그래서 다른 사람을 물어뜯고는 결국에 똑같은 사람이 되고 마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다만 다른 관점을 변호하고 싶고, 우리가 로렌츠의 문장들을 뒤집을 수 있고, 말해진 모든 것을 거꾸로 세울 수 있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이게 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예를 들어 우리 스스로를 우리들의 세계를 발명하는 사람 혹은 산출하는 사람으로 이해한다면 그때 적응의 문제는 전혀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겁니다. 그런 문제는 사라지는 것이지요. 우리가 발명할 수 없고, 우리에게 맞지 않는 것을 어떻게 발명하겠..
1. 그러한 우리의 능력을 보여줌으로써 유기체 내부에 베껴지는 어떤 외적 질서를 상정하지 않고서도 우리의 안정적인 인상들이나 지각들을 정당화시킬 수가 있군요. 옳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제가 사용하는 산출해냄Errechnen이라는 개념으로 다시 한 번 되돌아가고 싶군요. 그 개념은 'Er-'라는 마술적인 전철을 갖고 있는데 이 전철은 적극적인 과정과 창조의 모멘트를 암시합니다. 아직 없는 어떤 것이 창출됨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현실을 'er-finden'(발명하다), 'er-rexhnen'(산출하다), 'er-kennen'(인식하다)라고 말할 경우, 이때는 이미 있는 것을 수동적으로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어떤 창조적이고 활기찬 과정들이 문제가 됩니다. 뭔가가 산출되고 발명되는 것이지 발견되고 드러내..
1. 도대체 그게 맞는 말입니까? 현실세계와 지각된 세계간의 상호결합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요. 색을 지각하는 문제로 되돌아가 보더라도 붉은색이라는 것이 대상의 속성이 아니라 관찰자의 눈에 생기는 인상임은 당연히 맞긴 하지만 의식에게 빨간색이 하나의 색으로 다가오는데 이유가 되는 객체 자체의 특수한 구조가 역시 있어야 한다는 것도 맞지 않습니까? 저는 오히려 거꾸로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에게 붉은 것으로 나타나는 어떤 대상이 있다고요. 그러면 이러한 색에 대한 인상은 어떻게 설명되어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제기 되지요. 어떤 가정이 여기서 발견됩니까? 빨갛게 칠해진 대상이 바깥 세상에 존재한다고, 그리고 저의 지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다름 아니라 붉게 칠해졌다는 사실이라고 저에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
우리 대화의 흐름을 따라가 보면 우리는 이 지점에서 환경에서 오는 자극 혹은 외적인 것으로부터 벗어나서 유기체 내적인 것 그리고 신경들의 관계, 결합이라는 확산된 분야로 눈을 돌리게 됩니다. 내적인 것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나요? 이런 과정은 어떻게 좀 더 정확히 기술될 수 있을까요? 감각인상의 질적인 차이가 (감각을) 수용하는 장소에서 부호화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요하네스 뮐러의 매력적인 통찰을 분명히 하고 나면 감각인상의 질적인 차이가 중앙신경체계에서 생겨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감각인상의 '질'은 제 나름의 표현을 사용하자면 그곳에서 산출됩니다. (발명품 24) 유기체 내부에 도달하는 많은 자극과 인상들이 신경체계에서 하나의 연관(관련)으로 바뀌는 것이지요. 그게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신경체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냄새 나는, 색이 있는, 소리 나는 세계를 체험합니다. 그렇지만 당신이 말한 대로 우리의 감각은 우리에게 단지 구분할 수 없는 회색빛 자극만을 양적으로 전달해 준다고 한다면 뭔가 좀 이상합니다. 어떻게 감각기관 내부의 불특정하게 부호화된 양으로부터 다양한 뉘앙스와 특별한 질을 갖춘 세계가 생겨날까요? 그 질문은 부분적으로 요하네스 뮐러를 통해서 대답이 되겠네요. 어떤 세포는 특정한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다양한 느낌과 경험에 대해서 특화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다양한 세포들이 (감각의 최종기관이라 할 수 있는 그런 세포들이) 자극을 받게 되면 그 자극들은 신경체계에서 서로 서로 상호연관지어집니다. 그리고는 느낌과 지각의 풍성함이 생겨나게 되지요. 중요한 점은 이런 체험의 풍성함이라는 ..
우리 감각이 원래 그대로의 실재를 반영하지 않는다고요? 그래요.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우리는 결코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이라고는 자극을 받은 우리의 감각이 우리 앞에 펼쳐내 보이는 것 뿐입니다. 인식의 입구에서 (인식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소위 세계의 심부름꾼들은 (세계의 다양한 모습들은) 그들 자신의 특별한 속성들을 없애 버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연관하여 오늘날은 자극의 무차별적 부호화가 얘기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극 혹은 교란이 있다는 것만 알 뿐입니다. 이게 신경세포가 알려주는 전부입니다. 그러나 교란의 원인은 불분명하고 그 원인은 특수하게 부호화되어 있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시신경섬유를 식초로 자극할 경우 우리는 색이 있는 빛을 지각하게 됩니다. 혹은 미각을 느끼는 혀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