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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당신이 보고 있는 저 동물은 말이다. - 그렇다면 당신은 그것이 말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 나는 그것 속에서 말의 특징들을 인지하기 때문에 그것이 말임을 안다. - 그렇다면 당신은 당신이 인지한 그러한 특징들이 말의 특징들이라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 나는 그것들을 다른 말들 속에서 보았기 때문에 안다. - 그렇다면 말이란 무엇인가? - 그것은 말들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이 그것이 사람들이 말이라고 부르는 그러한 동물들의 특징들을 갖고 있기 때문에 말이라고 부르는 동물이다. - 하지만 그것은 순환 논법이다. - 아니다. 그것은 관찰자가 인간으로서 작동하면서 자기 자신의 체험 영역 속에서 구분의 타당화를 구성하는 순환적인 작동의 드러남이다.

1.
이 형이상학적 태도에는 어떠한 존재론적 가정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관찰자는 항상 자기 자신의 설명 방법의 토대들에 대해 자유롭게 성찰할 수 있으며, 또 자기가 생각하는 것이 자신이 타당하다고 간주하는 것에 타당성을 부여하는 것에 대해 자유롭게 성찰할 수 있다. 이 형이상학적 태도에서 하나의 진술은 그것에 타당성을 부여하는 조건들이 총족되는 영역에서 보편타당하다.
이것은 내가 처음에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자각하지 못한 채로 이루어 냈던 근본적인 형이상학적 변화였다.
2.

나는 생물학자, 즉 지각과 인지를 생물학적 현상들로서 설명하는 과학자였다. 그리고 나는 나의 설명들을 정식화하는 가운데 내가 설명하고 있는 생물학적 과정들이나 현상들을 잃어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는 내 '함들'에 대한 정합성들에, 그리고 인간 생명체계로서 나의 작동에서 이루어지는 내 '함들'에 대한 내 성찰들에 주목했다. 물론 나는 내가 생리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했음과 동시에 우리가 무엇을 하건 간에 그것의 토대들에 대해 성찰할 때 우리 모두가 철학을 하고 있는 한에서, 내가 또한 철학을 하고 있었음을 자각했다. 그러나 나는 내가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 연구의 과학적 본성에 대한 내 동료들의 경청을 무색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내 동료이자 나와 함께 산티아고에서 인지생물학 및 사랑의 생물학을 가르치기 위해 마트리스틱 협회를 세운 공동 설립자인 씨메나 다빌라 야네쓰가 자신은 내가 새로운 형이상학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고 나에게 말해주기 전까지는 나는 사실상으로 내가 그렇게 했다는 것을 완전히 자각하지 못했다. 또한 내가 생물학을 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철학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했다. 나에게 이러한 것을 알려주고, 또 자신의 성찰들을 통해 나의 이해력을 확장해 준 씨메나 다빌라 야네쓰에게 감사한다.
3.
과학과 철학의 분리는 하나의 분류학적인 고안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성찰과 함[행동]을 분리함으로써 우리 인간들이 우리의 삶 그 자체에서 하는 것에 대한 이해를 방해하고, 그리고 우리의 삶과 관련해서 우리가 갖게 되는 상이한 세계들에 대한 이해와, 이러한 상이한 세계들을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그리고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것에 대한 이해를 혼란스럽게 만들어 왔다. 그리고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까닭은 과학과 철학을 분리하면서, '우리가 하는 것'의 토대들에 대해 완전하게 성찰할 가능성을 우리 스스로 부정하기 때문인데, '과학자들로서의 우리'가 이것은 사실들만이 중요하므로 이러한 성찰이 부적절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거나, '철학자들로서의 우리'가 우리가 원하는 것이 궁극적인 진리들이지 물질적 사건들에 대한 실용학문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연철학'이라는 표현은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이 그들이 상호 평가절하가 아닌 상호존중 속에서 서로 경청하고 서로 주목하기 시작할 때 그들이 하고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더 잘 포착한다.
4.

우리 인간들이 하는 모든 것은 우리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그것이 그러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언어를 구사하는 생명체계들로서의 우리의 생물학적 존재가 어떻게 해서, 인간들의 창조적인 참여가 아니라면 테크놀로지를 통해 나타날 수 없었던 어떤 것으로 귀결되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 다른 어떤 이유에서가 아니라, 테크놀로지가 생물학적 존재들로서의 우리의 인간됨의 부산물이기 때문이라면 말이다. 더욱이 이 책에서 제시된 형이상학적 전환이 아니라면 이러한 이해는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떤 초월적 실재, 즉 우리의 삶 속에서 그리고 우리의 사유 속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의 기원인 존재론적 지반이라고 선험적으로 간주하는 어떤 초월적인 실재를 향한 본래적인 끊임없는 추구 속에 포획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초월적 실재는 작동적인 현존을 갖지 못하며 가질 수도 없다.
5.
일상적인 삶의 '함들'은 우리가 그것을 좋아하건 그렇지 않건 상관없이 그것들이,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아니면 우리가 하는 성찰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을 위한 출발점이라는 의미에서 일차적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우리 삶의 정합성들을 가지고 설명한다.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이 어떤 순환 논증을 구성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설명이란, 그것이 설명하는 것을 대체하지 않기 때문이다. 설명들은 단지, 설명 대상이 그 결과로서 발생하려면 어떤 일이 일어나야 하는지를 말해줄 뿐이다. 그래서 관찰자들 및 어떤 관찰하기의 설명들은 그 관찰자 및 관찰하기를 대체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단지 관찰자와 관찰하기의 그러한 작동이 발생하려면 어떤 과정들이 일어나야 하는지를 보여줄 뿐이다. 또한 만일 그것들을 낳고 그것들의 작동을 일으키는 조건들이 발생한다면 어떻게 관찰자와 관찰하기가 생기게 될지를 보여줄 뿐이다. 따라서 이러한 형이상학적 전환의 결과로서 우리가 어떠한 존재론적 가정을 하지 않고도 우리의 삶의 정합성들 속에서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은, 바로 이렇게 이 책에 표현된 형이상학적 전환으로 인해 우리가 우리의 삶(그리고 그것이 어떤 것이건 우리가 하는 모든 것, 생명체계들로서의 우리의 활동 속에서 하는 모든 것)의 작동적인 정합성들의 영역 속에 계속 있게 되기 때문이다. 관찰자들은 과학적인 설명을 하는 가운데 자기 자신의 체험들의 정합성들을 가지고 자신의 체험들을 설명한다. 대부분 자신이 '하는' 것에 대한 형이상학적 함축들을 깨닫지 못한 채로 말이다. 더욱이 과학자들은 종종, 자신의 설명들이 법칙들, 즉 자기 자신이 '하는' 것과 근본적으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과정들의 객관적인 영역으로서의 자연의 정합성들의 반영인 법칙들에 의해 뒷받침된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들은 자연의 법칙들이 자신들의 삶의 작동적인 정합성들로부터 추상한 것임을 깨닫지 못한다.
6.
나는 운이 좋게도, 살아 있는 존재들의 해부학적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그들의 자연발생적인 역동적 얼개를 이해하는 데 관심을 가진, 어떤 면에서 '아직 자기를 의식하지 못하는' 자연 철학자인 소년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또한 다음과 같은 점에서 운이 좋았다. 나는 나 자신이 내가 관찰했던 그러한 경이로운 모든 존재들과 결코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삶의 역동적인 얼개에 참여하는 무의식적으로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태도를 갖고 반복해서 그렇게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점에서도 나는 다른 아이들과 다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호기심의 측면에서 그들과 내 자신이 다르다고도 결코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 또한 내가 무엇이 되든지 그 모든 것을 온전히 존중하며 내 자신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허락한 하나의 축복이었다.
7.
마지막으로, 나는 이 머리말에서 다음과 같은 점, 즉 내가 행한 형이상학적 전환이 비록 여러 측면에서 동양철학과 유사하다 할지라도 이것이 그것이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언급하고 싶다. 동양철학은 영원한 것과 덧없는 것 사이의 구분에 입각해 있으며,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영원한 신성한 본질을 회복하기 위해 덧없는 것을 해방하는 길을 채택하도록 초대한다. 동양철학에서 덧없는 것은 극복되어야 할 어떤 환영이다. 내가 행한 형이상학적 전환에서는, 즉 발생하는 실재들의 형이상학의 근본적인 태도에서는, 우리 생명체계들 일반, 그리고 특히 우리 인간들은 덧없는 것의 영역에 속한 채로 나타난다. 이 영역에서 초월적인 것은 우리가 그것을 말하려 해도 그것을 부정하게 되는 - 그리하여 우리는 초월적인 것이 존재하지 않는 일상적인 삶의 영역에 남아있게 된다 - 어떤 것에 대한 하나의 관념이다. 그러나 이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 생명에 좋은 [합당한] 것은 모두 영원하지 않는 것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이고, 바로 이러한 영역 속에 사랑이 인간들로서의 우리의 토대로서, 그리고 우리의 행복의 원천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함으로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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