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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니체는, 자기 자신이 체험했기 때문에 한 철학자의 생애를 신비롭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철학자는 금욕적인 덕목들-겸손, 검소, 순수-을 독점하여, 그것들을 아주 특별하고 새로운, 실제로는 거의 금욕적이지 않은 목적들에 사용한다. 철학자는 그것들을 자신의 독특함의 표현으로 삼는다. 철학자에게서 그것들은 도덕적 목적들도, 또 다른 삶을 위한 종교적 수단들도 아니며, 오히려 철학 그 자체의 <결과들>이다. 철학자에게는 또 다른 삶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겸손, 검소, 순수는 이제 아주 풍부하고 넘쳐흐르는 삶, 능력으로 충만한 삶의 결과들이 되어, 사유를 정복하고 다른 모든 본능을 자신에게 종속시킨다.-이것이 바로 스피노자가 자연Nature이라고 부르던 것이다: 욕구에 기초해서, 즉 수단과 목적에 따라서 영위되는 삶이 아니라, 생산, 생산성, 능력에 기초에서, 즉 원인과 결과에 따라서 영위되는 삶. 겸손, 검소, 순수 이것들은 그[철학자]에게는 현자가 되는 방식이고, 자신의 신체를 지나치게 오만하고 지나치게 사치스러우며 지나치게 육감적인 원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신전으로 만드는 방식이다.
들뢰즈, <스피노자의 철학>p10


2.

2020.10.25. 농사일, 통일의병 모둠장 온라인 간담회, 일요 명상

“깨달은 사람인지 어떻게 구별할 수 있나요?”


깨달았다는 스승에게서 기만과 착취를 당했습니다

“Dear Sunim. During Sunday’s Meditation(October 18, 2020) I spent most of my sitting dealing with a strong subconscious issue. As a result, I found myself crying for most of my sitting. I realized that the issue was around feeling deceived and betrayed by my previous Zen Master. Therefore, I became aware that I am still holding resentment and anger toward him. During my 10 years of being involved with my Zen Master, I experienced indoctrination, suspected sexual misconduct, financial exploitation and lots of alcohol intake, all promoted by the spiritual community. I became conscious that this had affected my trust and is interfering with my actual practice. I can’t understand how an enlightened individual can take advantage of others. I want to leave this behind but my anger and resentment toward my previous Master is deeply seated in my subconscious. How can I get out of this turmoil?

명상을 하는 동안 제 무의식에 깊숙이 새겨진 어떤 잔재에 대해 번뇌하며 울고 있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가 옛 선 스승에게 기만과 배신을 당했었을 때 느꼈던 감정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결과적으로 아직 제가 그분에게 원망과 분노를 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10년 동안 저는 이단 교리에 주입되었고, 의심스러운 성적 폭력의 정황, 재정적 착취 및 과도한 음주 조장 환경을 경험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제가 속해있던 영적 공동체에 의해 조장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저는 타인을 신뢰하는 게 어려워졌고, 이것이 제 수행에도 방해가 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깨달은 자가 어떻게 다른 사람을 속여 이득을 취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지만, 옛 스승에 대한 분노와 원한이 잠재의식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혼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깨달은 자가 어떻게 이런 행동을 할 수 있는가, 이런 질문은 맞지 않습니다. ‘깨달았다고 말하는 자’라고 해야 정확한 표현입니다. ‘깨달은 자’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내가 깨달았다’, ‘내가 부처다’, ‘내가 성인이다’ 이렇게 말하면서 비행을 저질러 왔습니다. 지금 질문자는 깨달음에 대해서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일에 속았다고 표현하는 겁니다.

주식을 가지고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주식 중개인이 ‘이 회사에서 굉장한 기술력을 확보했기 때문에 이 주식은 앞으로 오를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얘기하면서 이 주식을 살 것을 권유했다고 합시다. 그래서 그 주식을 샀는데 처음에는 좀 올랐어요. 그래서 그 사람을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있다가 주식이 폭락해 버려서 큰 손실을 입었다면 이것은 누구의 책임일까요?

만약에 그 중개인이 법에 저촉되는 사기를 쳤다면 고소를 할 수 있습니다. 재판을 통해 그런 사람들이 주식 시장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도록 하면 됩니다. 그런데 만약 그것이 법적으로 처벌할 수 없는 적극적인 권유에 해당한다면 누구 책임일까요? 결국 그것에 대한 최종 책임은 본인한테 있어요. 본인이 손실에 대해서 기꺼이 책임을 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반드시 손실만 가져온 일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익이 된 측면도 있습니다. 첫째, 앞으로 주식을 계속하게 되더라도 다시는 이런 과장 광고나 사기에 속아 넘어가지 않도록 좀 더 유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둘째, 이 일을 계기로 주식에서 손을 뗄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손실이 반드시 손실이라고만 볼 수 없어요. 그 손실을 통해서 나는 더 큰 손실을 미연에 방지하는 계기로 삼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깨달은 사람인지 구별하는 방법

그 스승이 ‘내가 깨달았다’라고 말했다 해서 실제로 깨달은 게 아니에요. 정말로 그 사람이 깨달은 사람인지 판별할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거기에 속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깨달았다고 말하고 자기가 위대한 사람이라고 말하는데 내가 거기에 속지 않기 위해서는 몇 가지 평가 기준이 필요합니다.

속는 데는 그 사람이 속인 것도 나쁘지만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는 나에게도 원인이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파워를 숭상합니다. 첫째, 돈이 많으면 파워가 생겨요. 그래서 ‘재력’이라고 부릅니다. 둘째, 지위가 높아도 파워가 생깁니다. 그것을 ‘권력’이라고 부릅니다. 셋째, ‘신통력’을 가져도 파워가 생깁니다. 미래를 바라본다든지, 뭘 많이 안다든지 하는 그런 신비주의적인 요소도 큰 힘을 가집니다. 종교에서 사람들이 속을 때는 대부분 신통력이라고 하는 이 부분에 주로 속게 됩니다.

이런 일들은 모두 파워를 숭상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겁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재력뿐만 아니라 권력, 권력뿐만 아니라 신통력까지도 모두 부정했어요. 파워를 숭상함으로써 진실을 보지 못하고 많은 오류가 발생한다고 지적하셨습니다. 돈을 많이 가진 것이 잘못되었다는 뜻이 아니에요. 돈이 많으면 파워로 사용하지 않고 많은 사람을 위해서 베푸는 용도로 사용할 수도 있잖아요. 또 지위가 높은 것을 자신의 이익을 취하기 위한 파워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을 이익되게 하는 데도 사용할 수 있잖아요. 마찬가지로 신통도 어떤 신비주의를 조장해서 사람들이 재물을 보시하거나 복종하도록 사용하지 않고, 많은 사람을 이롭게 하는 데 사용할 수도 있잖아요. 부처님께서는 설령 신통력이 있다 하더라도 대중들에게 그것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대중들이 그 신통에 미혹되어 어리석어지는 부작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깨달았다고 하거나, 뭔가 신통력을 보여주는 그런 것에 현혹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가 어떤 삶을 사는지 그 모습을 봐야 합니다.

‘그가 검소하게 사는가?’

이걸 첫 번째로 체크해야 합니다. 그가 아무리 위대한 능력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검소하게 생활하지 않는다면 수행자로서 벌써 제대로 된 길을 가지 않는 사람입니다. 어떤 큰 건물이나 좋은 자동차나 좋은 옷이나 이런 것을 과시하는 삶을 살고 있다면, 그것은 수행자로서 바람직한 길을 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사람을 대할 때 겸손한가?’

이걸 두 번째로 체크해야 합니다. 자기가 승려라는 이유로, 자기가 신부라는 이유로, 어떤 지위를 내세워서 거만하고, 교만하고, 남을 무시하고, 잘난 체한다면 이것은 바람직한 수행자가 아닙니다.

‘그가 마음을 늘 고요히 간직하고 있는가?’

이걸 세 번째로 체크해야 합니다. 조금 기분이 좋으면 좋다고 흥분하고, 조금 기분이 나쁘면 화내고, 이렇게 감정 기복이 심하다면 바람직한 수행자라고 할 수 없어요.

‘그가 어떤 일을 할 때 사람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의논해서 어떤 결정을 하는가?’

이걸 네 번째로 체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일방적으로 결정을 내리고, 독선적으로 일을 처리한다면 바람직한 수행자라고 할 수 없어요.

이런 몇 가지를 점검해보면 그의 말이라든지, 그가 많이 안다든지, 미래를 내다본다든지, 이런 것에 현혹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방금 제가 이야기한 기본적인 것만 딱 점검해보면 ‘아! 이분은 올바른 길을 안내하는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반대로 그가 검소하고, 겸손하고, 마음이 고요하다고 해서 그가 위대한 수행자라고 말할 수는 없어요. 사물을 올바르게 보는 지혜도 함께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또한 지혜만 갖추고 있다고 해서 위대한 수행자라고 말할 수는 없어요. 지혜를 갖추고 있으면서 동시에 삶의 방식이나 사는 태도가 지금 말한 대로 검소하고, 겸손하고, 고요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이 모두 갖춰져 있어야 우리는 그를 존중할 만한 수행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내가 어리석고 진실을 보는 눈이 없어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 내가 어리석어서 그런 환영을 봤구나!’ 하고 여기서 딱 끝내야 합니다.

질문을 들어보면 질문자가 아직도 법의 진실에 대해서 제대로 보고 있지 못한 것 같아요. 만약 법의 진실을 제대로 보고 있다면 ‘아! 그땐 내가 어리석어서 그랬구나!’ 하고 한밤에 악몽을 꾼 것처럼 딱 끝이 나야 합니다. 아직도 옛날에 입은 상처를 트라우마로 가지고 있는 겁니다. 질문자가 갖고 있는 트라우마를 먼저 치유해야 합니다.”

이어서 한 가지 질문에 대해 더 답변을 한 후 명상을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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