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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가 이해한 바로는 니체의 계보학, <도덕의 계보학>은 요컨대 '가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누구의 가치인가?"로 바꾸는 것이었다. 이렇게 가치의 가치를 묻는 계보학적 태도는 이 가치가 누구에 의해 주장되었고 결국 누가 발명했는지를 주목하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가치란 무엇인가?라고 물으며 가치를 객관적이고 외부세계에 존재하는 실재론으로 삼는 입장을 경계하는데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실재론이 각자의 책임을 제거한다는 점이다. 덧붙여 계보학적 태도는 실재론적 주장이 틀리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계보를 따라감으로서 그 과정을 이해하는 동시에 그것과 다른 태도를 드러내주는 적절한 방편으로 생각된다.
2.
저를 어떻게든 특정한 범주에 넣으려는 당신의 시도와 당신이 사용하는 그러한 인식론적 어휘들은 나 자신을 상당히 불행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내게 보여준 그런 입장에서는 존재론이라는 (실제적으로 존재하는 것에 대한 가르침이라는) 끔찍한 사고방식에 다시 들어가게 하는 뒷문이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입장을 따를 경우 우리는 또다시 외부세계의 존재에 대해서 얘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외부세계와 주어진 것에 기댐으로써 각자의 책임이라는 것이 제거됩니다. 이 점이 존재론의 아주 끔찍한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아무런 죄가 없어 보이는 '뭐가 있다'라는 공식을 도입하는데 이는 제가 농담 삼아 그리고 다소 불쾌하게 '외적으로 존재하는 연산자'라고 불렸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강압적으로 말합니다. '그게 이렇다. 뭐가 있다'라고. 그런데 뭐가 있다는 말입니까? 뭔가가 사실이라고 누가 주장합니까? 저는 그렇게 실재하는 것 그렇게 주어진 것을 우리 자신의 생산물이자 우리 자신의 발명으로 파악할 것을 주장합니다. (발명품 36)
3.
되풀이 할 수밖에 없네요. 지금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특정한 관념이 있는데 그런 관념으로 인하여 그런 진술이 생겨납니다. 사람들은 특정한 역사적 사회적 조건하에서 어떤 종의 생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서 환경에 대한 점진적 적응이 완수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롱 우리가 환경이라고 명명하는 그것이 내적인 것의 외적 결정인자가 되는 겁니다.
제가 제대로 이해했는지 모르겠지만 당신은 누가 옳은지, 누가 종의 출현, 환경과 적응이라는 현상의 존재와 영향력 등에 대한 진리를 갖고 있는지를 묻지 않는 군요. 대신 당신은 로렌츠가 대변하는 견해에 비해서 그저 그르다고 할 수 있는 견해를 내세우는군요.
맞습니다. 저에게는 누가 결국에 옳으냐 하는 끔찍한 질문이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편협함(불관용)과 싸움만이 지배하는 그런 논의에 저는 관심이 없습니다. 저는 다른 생각(사고)을 논박하고 싶어하는, 그래서 다른 사람을 물어뜯고는 결국에 똑같은 사람이 되고 마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다만 다른 관점을 변호하고 싶고, 우리가 로렌츠의 문장들을 뒤집을 수 있고, 말해진 모든 것을 거꾸로 세울 수 있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이게 하고자 합니다.(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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