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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왜 그렇습니까? 뭐가 유아론적입니까? 당신은 저와 마주앉아 있고 우리는 서로 대화를 하고 있으며 우리는 심지어 악수를 하기도 합니다. 이것들은 결코 환상이 아니며 결코 가공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내가 외적 실재를 받아들인다는 말이 아니냐고 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내 목소리를 듣고 나와 악수하고 그리고 여러 가지 느낌들의 지속적인 상호연관을 통해서 당신은 하인츠를 구성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인츠 폰 푀르스터에 대해서 그리고 베른하르트 푀르크센에 대해서 말할 수 있기 위해서 우리는 실재라고 표현하는 어떤 연결고리를 발명해 냅니다. 유아론자들은 그들이 홀로 있음을, 그리고 완전히 고립되어 있음을 주장하고 타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다른 어떤 것도 없다고 주장합니다. (발명품 37)

2.

두 번째 태도는 나는 괄호 친 객관성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의 감정적 기초는 다른 인간들과의 교제를 '즐기는' 것입니다. 관찰자의 질문은 충분히 받아들여지고, 모든 시도가 그것에 대답하기 위해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길에 따르면 객체들과 존재의 체험 사이의 구분이 부정되지는 않지만 객체들에의 준거[참조]가 설명들의 기초는 아닙니다. 모든 설명의 토대를 구성하는 것은 바로 체험들 간의 정합성입니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자면, 관찰자가 모든 실재들의 기원이 됩니다. 모든 실재들은 관찰자의 구분 작동들을 통해 창조됩니다, 우리는 구성적 존재론들의 영역으로 들어왔습니다. 모든 존재는 관찰자들의 '함'을 통해서 구성된다는 존재론 말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설명의 길을 따른다면, 우리는 우리가 결코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할 수 없고 무수한 가능한 실재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한 실재들 각각은 완전히 정당하며 타당합니다. 물론 바람직한 정도는 다를지라도 말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설명의 길을 따른다면, 우리는 우리의 주변 인간들의 복종을 요구할 수 없고, 그들에게 귀를 기울일 것이고 협력과 소통을 추구할 것이며, 어떠한 상황 아래에서 우리가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것'이 타당하다고 간주하게 될 것인지를 찾아내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떤 주장은 만일 그것이 실재의 적절한 영역의 타당화 기준들을 충족시킨다면 참될 것입니다. (있음에서 함으로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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