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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행복 기준은, 우리가 사람들이 그들의 인생행로와 관련하여 취하고 있는 어떠한 상상 가능한 결정에 대해서도 우리가 단순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은데요. 선생님은 절대적 관용을 주장하고 있는 건가요?
내가 볼 때 관용에 호소하는 것은 매우 불쾌한 구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괄호 없는 객관성의 길로 편향된 표현입니다. 관용을 요구하는 사람들은 실제로, (정당한 것으로 되어야 한다고 이미 결정해버린) 다른 사람들에 대한 거부와 폄하를 잠깐 동안 연기하고 유예하자고 제안하는 것일 뿐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관용하는 사람들은 당분간 그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만, 언제나 자신들의 등 뒤에 칼을 숨기고 있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정말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들만의 관념과 믿음이 전면에 그대로 내세워져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잘못되어 있지만 그들의 파괴는 잠깐 미루어져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관용인 것입니다. 하지만 괄호 친 객관성의 길을 따르면 우리는 다른 사람의 세계관을 경의를 가지고 대하게 되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준비를 갖추게 됩니다. 그들의 실재들을 인정하고, 그것들을 근본적으로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일 준비를 갖추게 됩니다. (있음에서 함으로 75)
T.
#관용이아니라존중 #마뚜라나
나의 경우를 돌아보면, 내가 "정답은 없어요"라고 말하면서 "정답은 없어요"를 정답으로 말하고 있을 때, 나는 내가 상대의 말을 경청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한다. 해서 나는 내 생각이 '정말로' 정답이 아님을 의식적으로 의식한다. 말하자면 내가 옳다는 확실성과 분별을 내려놓으려 의식한다. 그랬을 때(오직 모를 뿐!), 상대의 이야기가 귀에 들어오더라.
"보자보자하니까" 관용은 대게 3번 뿐이다. 더이상 듣지 않는다. 반면 존중은 끝이 없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세계관을 경의를 가지고 대하게 되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준비를 갖추게 됩니다. 그들의 실재들을 인정하고, 그것들을 근본적으로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일 준비를 갖추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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