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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관찰자라는 개념이 전혀 불편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일상적인 체험을 하는 가운데 여러 사물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은, 우리가 지각하고 다루는 그 사물들이 우리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당연히 함축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우리는 마치 우리가 우리 자신과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외부의 관점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관찰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 자신에 대해 말합니다. 이것은 결국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입니다. '관찰자들은 (자기 자신을 포함하는) 어떤 것을 그것이 마치 자신들과 분리될 수 있는 것처럼 구분하는 인간들이다.' 그래서 이제 이 체험이 설명되어야만 합니다. (함으로 47)
T.
관찰자라는 개념은 "마치 자신들과 분리될 수 있는 것처럼 구분"한다. 말을 바꿔 관찰자의 구분인, 분별은 생을 이어가는데 (독인지 약인지 분별하는) 중요한 기능이다. 그런데 이 관찰자의 분별이 분리될 수 없는 것을 구분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분별을 분리로 독립시키고 옳고 그름이 정해진 고정적으로 구분한다면 왜곡(특정한 상황들을 정확하게 지각해내는 것을 방해하는)을 하게 되므로, 분별 속에서 분별을 내려놓아야할 순간이 늘 있다.
"어떤 사람의 진정한 지혜는 영속적인 자기 고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찰의 역량에, (특정한 상황들을 정확하게 지각해내는 것을 방해하는) 이러저러한 신념들을 기꺼이 버릴 수 있는 자발성에 있다는 것이 내 견해입니다. 현명한 사람은 늘 자기 자신을 관찰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해야만 하는가를 지시하고 있는 궁극적 진리에 인도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 움베르또 마뚜라나, <있음에서 함으로> p54
분별을 내려놓으라는 소리는 이런 의미이다. "긍극적인 진리에 인도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므로" 내가 옳다라는 분별을 자발적으로 내려놓는다. 특정한 상황을 정확하게 지각해내기 위해서 말이다.
요컨대 특정한 상황과 별개로 (옳다 그르다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분별을 내려놓아라.
정해진 것은 없다. 분별을 내려놓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