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어른 스님께서 법상에 올라 법문을 하실 때 가끔씩 묻습니다."이것을 주장자라고 해도 맞지 않고 아니라고 해도 맞지 않다. 그럼 이것을 무엇이라 해야 하겠는가?"
이것은 '주장자'라는 이름과 '주장자라는 이름이 가리키는 사물'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삶의 여실한 모습을 깊숙히 꿰뚫어 보는 지혜가 순간순간 살아 있는가를 점검라므누것입니다. 만일 주장자를 주장자라 한다면 이는 상견상견에 떨어지는 것이고, 주장자가 주장자가 아니라고 한다면 단견단견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또한 주장자이면서 주징자가 아니라고 해도 마지 않고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해도 맞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유,무,역유역무亦有亦無,비유비무非有非無의 주장을 부처님께서는 사견이라 하셨습니다. 그것은 있고[有] 없는[無]것의 주어를 설정하고 그에 대해서 있다거나 없다고 단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무같은 술어로 보면 다르지만 이 술어가 가리키고 있는 주어로 어떤 것이 전제된다고 하는 데서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유무의 주어가 <금강경>에 따르면 사상四相이 됩니다. 그래서 상을 갖지 않는 것이 있는 그대로의 마음이며 법계가 됩니다. 상에 끄달리는 것은 중생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참된 삶, 깨달음의 세계인 법계 비로자나 부처님을 등지는 것입니다. 상을 버리는 것이 스스로의 본디 모습인 연기실상의 법계로 사는 것입니다. (법성게 232)

'정화스님의 <법성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연기의 공  (0) 2021.02.02
총지  (0) 2021.02.02
여의보배  (0) 2021.02.02
법신/화신/보신  (0) 2021.02.02
빈 마음, 무심  (0) 2021.02.02
댓글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