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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자인 그레고리 베이트슨이 정신분열증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을때 두 명의 낙담한 정신과 의사들이 그를 방문하여 어떤 '아픈' 아이에 대해서 얘기했습니다. 그 아이는 학교에서 공포의 대상이고 무시무시하게 행동하며 급우들을 위협하고 잉크병을 던지고 가족을 폭행한다고 말이지요. 그러면서 그들은 베이트슨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때 베이트슨은 그 애를 더 이상 따로 봐서는 안 되고, 말하자면, 생태학적인 관점에서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래서 그 아이의 행동에 불편을 제기하는 모든 이들을 불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문했습니다. 그런 행동은 어떤 관점에서 의미가 있을까? 그런 행동은 어디에 끼워 맞출 수 있을까? 마침내 부모와 형재들 그리고 선생님이 왔습니다. 첫 번째 만남을 가진 후 베이트슨은 의사들에게 말했지요. "그 아이는 자기 주변에서 유일하게 건강한 사람입니다! 그 애가 그런 환경, 여건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절망적으로 시도하고 있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닙니다." 이 예는 한 사람만을 문진했을 경우 이런 관점에 이를 수 없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그 아이는 오히려 계속 병적인 것으로 간주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발명품 120)
2
그래서 저는 개념 자체를 버리고 아픈 사람에 대한 그 무엇이 아닌 다른 표현을 사용해 보라고 말입니다. 어쩌면 그들은 자신들을 다른 사람을 돕는 친구(가족들의 친구)로 묘사해야 할지 모릅니다. 심리치료학자를 방문하는 어떤 사람이 아픈지 아니면 건강한지 누가 알겠습니까? 다만 그 사람은 불행을 겪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만이 확실합니다. 그는 도움이 필요해서 오는 것이지 치료되기 위해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처지나 세상의 상태에 대한 슬픔은 반드시 병적인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어쪄면 그저 뭔가가 어긋나 있다는 점, 뭔가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는 점, 슬퍼할 어떤 이유를 갖고 있다는 점을 알아차리는 정신적 건강함의 표시일 수도 있는 것이지요. (121)
3.
아이가 공부는 안 하고 컴퓨터 게임만 하니 속이 탑니다.
이럴 때 우리는 '제법이 공함'을 봐야 합니다. 그 아이는 다만 그럴 뿐이지요. 컴퓨터 게임을 할 뿐이고, 놀뿐인데 그걸 보는 내 생각, 내 기준 때문에 분별이 일어나고 화가 일어납니다. 그걸 보고 내가 못 참아서 문제 삼은 것이기 때문에 아이를 야단치는 것은 내가 화를 푸는 방법에 불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에게는 잔소리가 되는 거지요. 이럴 때 잔소리를 안 해야 한다는 것은, 잔소리를 하고 싶지만 참는 거지요.
세속에서는 참는 사람을 좋은 사람이라고 하지만, 수행의 관점에서 보면 참는 것은 수행이 아닙니다. 즉 문제를 본질적으로 보면 참는 것은 수행이 아닙니다. 즉 문제를 본질적으로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이때 자기를 봐야 합니다.
'아이가 저런다고 내가 왜 화가 날까, 아이가 저런다고 내가 왜 괴로울까?' 이렇게 문제의 원인을 살펴야 합니다. 내 의견을, 내 취향을, 내 생각을 고집하기 때문에 답답하고 화가 나고 괴롭고 슬픈 것입니다. 그 고집하고 있는 것을 놓아야합니다. 이걸 '상'이라고 이름하면 '상'을 버려야 하고, 이게 '아집'이면 아집을 내려놔야 합니다. 이게 '분별'이면 분별을 끊어야 하고, 이게 '집착'이면 집착을 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아이가 어떻게 하든 나는 편안해집니다. 이미 화가 났는데 그것을 밖으로 내느냐, 안 내느냐 하는 것은 세속적인 선악의 문제입니다. 밖으로 화를 안 내고 참으면 선이고, 밖으로 화를 내면 악이라는 생각은 세속적인 잣대의 선악입니다. 그건 이미 화가 났을 대 그에 따른 대응일 뿐입니다.
그럼녀 수행이란 무엇인가? 화가 왜 일어났느냐를 연구하는 겁니다. '애가 저런다고 내가 왜 화가 날까?' 이것을 돌이켜보는 거지요. 그래서 화가 나지 않게 되는 것이 수행입니다. 화를 안 내는 게 수행이 아니고, 화가 나지 않는 것이 수행입니다. 화가 나지 않으니까 참을 게 없어요. (답답하면 물으라 94)
4.
내가 편안해지면 이 세상 모든 것이 아무 문제가 없어요. 그러면 여러분들 또 이렇게 묻지요. "저만 편안하면 됩니까? 아이는 어떻게 하고요?" 내가 편안하면 아무 문제도 없어요. 다 내가 불편하기 때문에 자꾸 문제를 삼는 거지요. 그러니까 이게 모두 나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만 편안하면 됩니까?"하고 묻겠지만, 내가 편안해지면 자연스럽게 아이를 위하는 길이 뭘까 생각하게 됩니다. 내가 지금 미리 이야기하지 않아도 그때는 저절로 알게 됩니다. 내 의견을 고집해서 말할 때보다 그냥 내 의견을 말할 때 받아들여질 확률이 더 높지요. 또 아이가 안 받아들여도 아무 문제가 안 됩니다.
사실은 아이가 안 되는 게 아니라 내가 안 되는 겁니다. 잔소릴를 하는 게 잘못됐다는 뜻이 아니라, 잘하고 잘못한 것이 없는데 있다고 생각한 것이 잘못됐다는 것입니다. (95)
T.
"그때 베이트슨은 그 애를 더 이상 따로 봐서는 안 되고, 말하자면, 생태학적인 관점에서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래서 그 아이의 행동에 불편을 제기하는 모든 이들을 불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문했습니다. 그런 행동은 어떤 관점에서 의미가 있을까? 그런 행동은 어디에 끼워 맞출 수 있을까?"
그 아이의 행동에 불편을 제기하는 모든 이들. 이들은 자기가 옳다는 기준에 아이의 행동이 옳지않다는 생각, 한 생각에 치우쳐있다. 이를 생태학적인 관점에서 살펴본다면 옳고 그른 것을 떠나 다만 다를 뿐임을 인정하는 조건들에 눈돌리면 그런 행동은 어떤 관점에서 의미가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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