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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대답할 수 없는 물음 그리고 하나 이상의 답이 있는 물음은 그들 자신에게도 환영할 만한 것이라는 점을 선생님들에게 알려줘야 합니다. 고학년 수업에서 시저의 살해에 대해서 얘기가 되고 있는데 한 학생이 고대 로마의 어떤 정치적 상황이 시저의 살해를 초래했는지 알고자 합니다. 이때 선생님이 답을 알고 있지 않다고 가정할 경우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불명확하게 혹은 신경질 적으로 반응하거나 아니면 이런 상황을 공동 작업으로의 유인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 학급의 한두 명쯤이 도서관에서 가서 이 주제에 관한 작은 보고서를 준비하게 될지 모릅니다. 이런 것은 선생님에게도 새로운 것 또는 자신에게 아직 알려지지 않는 것을 경험할 멋진 기회이기도 한 것입니다.
좀 더 극적으로 표현하자면, 수업에서의 대부분 시간은 정당하지 않은 질문을 던지고 대답을 요구하는데 사용되고 있습니다. 저는 답이 이미 알려져 있는 그런 질문을 정당하지 않은 질문이라고 정의하고자 합니다. 선생님이 그런 유형의 질문을 하는 경우 그것은 지저분하고 저급한 짓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벌써 그 답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에 반해서 정당한 질문은 진짜 질문입니다. 그런 질문에 대해서는 아직 완성된 답이 없습니다. 학교 같은 기관이 그런 정당한 질문을 우선적으로 다룬다면 멋지지 않겠습니까? (발명품 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