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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치료학자인 저의 친구 파울 바츠라빅에게 감사하고 싶은 하나의 예를 통해서 시작해 보겠습니다. 그는 저에게 얘기 했습니다. 미국에는 정말 중요한 진단 지침서가 있다고요. DSM이라고 하는 것인데 늘 개정판이 나온답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이 책은 동성애라고 불리는 병에 주목했었는데 그 후 개정판이 나왔을 때 사람들이 투쟁을 통해서 동성애를 더 이상 하나의 병으로 분류하지 않기로 결정했답니다. 이런 결정으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치유가 된 겁니다. 갑자기 동성애는 정신병의사들이 치유해야 할 병이 아닌 것으로 되어 버렸으니까요.
다분히 그렇습니다. 이 예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병으로 여겨지는 것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얼마나 우리의 문화적 여건에 의해 각인되는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승된 선입견을 없앨 다른 관점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애써 투쟁해야 합니다. 그러면 새로운 시각이 병에 대한 우리의 해석을 완전히 바꿀수 있습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인류학자인 그레고리 베이트슨이 정신분열증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을때 두 명의 낙담한 정신과 의사들이 그를 방문하여 어떤 '아픈' 아이에 대해서 얘기했습니다. 그 아이는 학교에서 공포의 대상이고 무시무시하게 행동하며 급우들을 위협하고 잉크병을 던지고 가족을 폭행한다고 말이지요. 그러면서 그들은 베이트슨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때 베이트슨은 그 애를 더 이상 따로 봐서는 안 되고, 말하자면, 생태학적인 관점에서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래서 그 아이의 행동에 불편을 제기하는 모든 이들을 불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문했습니다. 그런 행동은 어떤 관점에서 의미가 있을까? 그런 행동은 어디에 끼워 맞출 수 있을까? 마침내 부모와 형재들 그리고 선생님이 왔습니다. 첫 번째 만남을 가진 후 베이트슨은 의사들에게 말했지요. "그 아이는 자기 주변에서 유일하게 건강한 사람입니다! 그 애가 그런 환경, 여건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절망적으로 시도하고 있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닙니다." 이 예는 한 사람만을 문진했을 경우 이런 관점에 이를 수 없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그 아이는 오히려 계속 병적인 것으로 간주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발명품 120)
스위스의 작가긴 아돌프 무쉬그의 책에서는 '병이란 규범을 의심하는 건강한 반작용이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 인용은 정말 탁월하게 어울리는 군요. 왜냐하면 그 인용은 질병과 건강이 정태적인(고정된) 크기를 갖는 게 아니라 둘 간의 특정한 연관체계에서 판단되어야 한다는 점을 비판가의 관점에서 드러내 주니까요. 저는 질병, 건강, 치료 등의 개념들의 명확성이라고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누군가 건강에 대해서 말하면, 또 치료 혹은 (뉴에이지 추종자들 사이에서처럼) 치유라는 개념이 등장하면, 곧바로 병에 대한 생각이 도입되고 그리고 다른 어떤 사람이 암묵적으로 병적인 사람으로 여겨지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가족 치료학자로 일하는 제 친구들에게 늘 제안합니다. 치료라는 개념 자체를 버리고 아픈 사람에 대한 그 무엇이 아닌 다른 표현을 사용해 보라고 말입니다. 어쩌면 그들은 자신들을 다른 사람을 돕는 친구(가족들의 친구)로 묘사해야 할지 모릅니다. 심리치료학자를 방문하는 어떤 사람이 아픈지 아니면 건강한지 누가 알겠습니까? 다만 그 사람은 불행을 겪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만이 확실합니다. 그는 도움이 필요해서 오는 것이지 치료되기 위해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처지나 세상의 상태에 대한 슬픔은 반드시 병적인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어쩌면 그저 뭔가가 어긋나 있다는 점, 뭔가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는 점, 슬퍼할 어떤 이유를 갖고 있다는 점을 알아차리는 정신적 건강함의 표시할 수도 있는 것이지요. (발명품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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