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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신은 어떤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닌 것과 같이, 어떤 목적을 위해서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신은 존재함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작용함에 있어서도 아무런 원칙이나 목적을 갖지 않는다.

목적원인이라고 불리는 것은 인간의 충동이 어떤 사물의 원칙 또는 제1원인으로 생각되는 한에 있어서 인간의 충동에 지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거주는 이 또는 저 가옥의 목적원인이었다고 우리가 말할 때, 확실히 우리는 인간이 옥내생활의 이점을 표상함으로 인하여 가옥을 건축하려는 충동을 가졌다고 이해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거주는, 그것이 목적원인으로 생각되는 한에 있어서, 이러한 특정한 충동에 지나지 않고, 이 충동은 실제로 작용원인이며, 제1원인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인간은 보통 자기의 충동의 원인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내가 전에 종종 말한 것처럼, 인간은 자기의 행동과 충동을 의식하고 있지만, 자신으로 하여금 어떤 것을 원하도록 결정하는 원인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연이 때때로 실패하거나 실수를 저지르며, 불완전한 사물을 산출한다고 하는 일반 대중의 의견에 관해 말하자면, 나는 이것을 제1부의 부록에서 다루었던 허구[환상]들 중의 하나로 간주한다. (에티카 4부 서론 234)

[충동은 원인이 아니고 목적이 없다. 충동은 산출된 결과이고 상호작용의 구조적 결정이다. 충동은 원인을 모른채 자체 구조의 질서 속에서 결정된다. 충동을 성욕과 수면욕 등 욕망으로 이해하는 것은 의식된 분별에 불과할 뿐 하나의 흐름이 있을 뿐이다.
내 몸의 변이를 관념하는 마음을 관찰자가 분별한다. 분별되는 것은 언어로 이름붙여지고 한정된다. 성욕, 식욕, 수면욕 등등. 허나 성욕은 그 이름이 성욕일 뿐 성욕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성욕을 바라보는 관점은 성욕에서 성욕 아닌 것을 보는 이중보기가 필요.

내가 잘못 알고 있는 앎을 주도하는 마술은 인과론적 설명이라는 결론

*충동은 결과만을 받아드리고 원인을 모르는데 이 무지를 목적인으로 메우므로서 결과가 원인으로 전도된 환상에 사로잡힌다.]

2.

다시 강조 하건대 설명은 관찰된 두 가지 내용을 의미론적으로 묶어낸 결과물로 파악되어야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이래 우리는 우리 문화의 주된 설명원리(인과론적 사유)가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형태에 따라서 관찰된 내용간의 관계도 다르게 표현되었고요.

가령 목적원인과 작용원인이 있습니다.

작용원인이 특히 선호되었는데,
이는 변형규칙에 맞게 미래의 어떤 작용을 낳는 과거의(시간적으로 앞선) 원인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손에 뭔가를 잡고 있다가 손을 펴면 물건이 만유인력의 법칙에 맞추어 아래로 떨어지는 것과 같이, 이 경우 원인은 뒤에서 (시간적으로 과거로부터) 작동합니다.

목적원인은 현재의 행위를 불러일으키는 미래의 작용을 기술하고 있어요. 이 경우 원인은 소위 앞에서 (시간적으로 미래로부터) 작동합니다. 이런 식의 인과원리로는 예를 들어, 이미 아리스토텔레스도 예감했던 듯한데, 오늘날 널리 행해지는 조깅을 생각하면 됩니다. 사람들은 먼 훗날 건강해지기 위해서 달리고 달리죠. 현재 달리는 행위의 이유는 (원인은) 미래에 있는 것입니다.

어쨌건 목적원인이나 작용원인이나 똑같은 삼원적 구조를 갖추고 있습니다. 여기서 선택된 것은 하나의 특정한 형식이고 그 형식은 연역적 논리를 따르고 있으며 아리스토텔레스도 이런 설명의 원리를 연역적 논리에서 취한 것입니다. (발명품 80)

3.

제일 먼저 발견해낸 것은 살아 있는 존재의 연산(작동)을 설명하는데 사용될 기술적 언어였습니다. 제가 설명이라는 것을 두개의 관찰을 서로 묶어주는 의미론적 다리로 묘사했던 것을 상기해 보십시오. 설명은 언어의 한 현상입니다. 왜 개구리가 특정 장소로 팔짝 뛰어갈까?라고 물으면 개구리는 그곳에 있는 파리를 잡아먹으려고 라고 답할 겁니다. 일어난 일은 사람들이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원인에 유사한 의미론적 관계를 구성한 것입니다. 원인은 미래에, 행위는 현재에 있는 목적원인 말입니다. 개구리의 도약은 특정 목적을 이루려는 개구리의 시도로 비춰졌습니다. (발명품 172)

T.

집을 짓고픈 충동은 거주할 목적을 원인으로 산출된 충동이라는 가정 아래, 충동이 집을 짓는 제1원인인 것.
요컨대 집을 짓고픈 충동은 거주할 목적[의 제1]원인이라는 것. 그러나 충동의 실상은 왜 충동이 일어났는지 그 원인을 모르는데, 원인을 모른채 그 결과만이 산출된 충동을 거주할 목적원인으로 전도시키는 허구 또는 환상. 환상을 실체로 앎으로서 생기는 불일치와 부작용. 다시 정리하면 결과[충동]를 원인[충동]으로 전도시키는, 전도몽상.

이해한즉, 전도몽상의 부작용은 뱀이 없는데 있다고 잘못 앎으로서 생기는 두려움, 괴로움.

반대로 뱀이 있는데 없다고 잘못 앎으로 생기는 사고와 희생.

뱀이 있으면 있는데로 알고, 없으면 없는대로 아는 것이 뱀으로부터 자유롭게 사는 길이다.


다시 예를 들어, 성충동을 섹스 할 목적원인, 제1원인으로 삼는 것은, 우리는 성욕이 일어나는 원인을 모르는 데, 성욕이 제1원인이고, 즉 성욕이 일어남으로해서 섹스한다는 결론에 이르는 인과론적 설명은 거짓말.

목적이란 일종의 결핍인데, 성욕이 육체적인 섹스를 목적원인으로 하는 제1원인, 즉 성욕을 원인으로 설명하는 인과론적 사유는 허구라는 이해.

따라서 욕구를 결핍으로 정의하는 건 인과론적 설명의 환상. 욕구는 반대로 목적이 없는 생산이란 설명은 원인을 모르므로 목적도 없는, 즉 목적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무한한 생산이며 무한한 가능성이다. 때문에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허구인 것은,



부연할 것은 성욕이 일어나는 원인을 모른다는 것은, 성욕을 유발할 순 있어도 결정할 수 없는데,

우리는 성욕이 일어나는 원인을 모르는채 구조적으로 결정되어 성욕이 산출된 것이므로


성욕은 외부의 목적원인이 될 수 없다.

는 성욕을 유발할 순 있어도 결정할 순 없다.

체계로서 지시명령적 상호작용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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