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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당신도 아시겠지요? 우리가 인상파에 대해 이야기할 때 놀라운 일은, 그 모든 화가들에 대해 생각하자마자 그들이 얼마나 서로 다른지를 알아차릴 수 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정의를 내리는 데 신중해야 합니다. 위대한 화가는 결코 하나의 범주로 환원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이러한 화가들은 인상파이고, 다른 사람들은 표현주의자들이며, 그리고 또 다른 화가들은 입체파라고. 그러나 우리는 근본적으로 아무 말도 안 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말함으로써 당신은 그림 그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 어떤 양식을 단지 자기 동일시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화가의 잔인한 손 100)

T.

정의 내리기, 이름 붙이기의 정의, 이름은 이름으로 환원되는 동일시를 방조하기 때문.
정의내리기, 이름 붙이기는 다양성을 제한하고 맞다 틀리다를 가려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하기 쉽다. 가령 이것은 죽비다라고 정의하면 죽비라는 분별에 고정되어 죽비의 다른 가능성의 면목을 보지 못하게 한다. "이것이 죽비라 함은 죽비가 아니므로 이름이 죽비이다.
"
[정의 내리기, 이름 붙이기를 피하는 이유. 불립문자]

2.
그렇지만 현재 통용되는 다양한 정의들을 정리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인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수학자인 노버트 위너는 사이버네틱스는 생명체와 기계에 있어서 규제와 정보전달에 관한 학문이이라고 적고 있고 기업과 경영 컨설턴터인 스태포드 비어는 사이버네틱스를 조직의 학문으로 정의하며 신경철학자인 워런 맥컬럭은 커뮤니케이션을 통한 지식의 산출을 다루는 인식이론이라고 얘기합니다. 미국 사어버네틱스 학회의 선언에서는 '사이버네틱스는 사실들의 수집이 아니라 사유의 방식이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고든 패스크는 좀 더 일반화해서 '그것은 예술 혹은 철학이고 삶의 방식이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규정을 하려는 그러한 시도들 속에서 아주 멋진 무지개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고 먼저 저의 기쁨을 표현하고 싶습니다. 이것들은 접근방법의 다양성을 허용해주는 것입니다. 가능한 것의 폭과 느슨함이 멋진 자극이 됩니다. 여기서는 각자가 자신에게 고유한 방식으로 드러내는 어떤 입장이나 태도가 문제입니다. 이게 사이버네틱스의 매력입니다. 몇몇 사람들에게 하나의 정의를 요구하는데 사어버네틱스에 대해서 알게 되는 바는 별로 없고 대신 정의를 내리는 사람에 대해서, 그의 전공분야에 대해서, 그가 세상과 어떻게 관련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은유를 즐기는 모습에 대해서, 경영에 대한 그의 찬사에 대해서, 커뮤니케이션이론 혹은 정보이론에 대한 그의 관심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저의 친구들인 스테포드 비어, 워런 맥컬럭, 노버트 위너, 고든 패스크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게 됩니다. 멋진 일이지요. (발명품 166)

자기 스스로를 조직하는 체계의 특징들이 어떤 다른 방식으로 기술될까요? 자기조직화의 개념을 어떻게 정의하시렵니까?

저는 정의를 하지는 않겠습니다. 더 이상의 정의를 유보하고 대신 어쩌면 이 개념에 대한 좀 더 심도 있고 동적인 해석을 가져올 일련의 고찰과 아이디어에 관해 얘기해 볼 것을 제안하고자 합니다. (발명품 143)

2.
자기조직화에 대한 당신의 이해방식은 경영에서의 구체적 통솔과제와 어떻게 관련되나요? 

저는 자기selbst라는 개념을 동적인 방식으로 해석하고 조직화라는 개념을 다르게 바라보도록 하고 싶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 같은 다소 복잡하고 완결되지 않은 정의를 갖고 행하는 접근방법을 취한다면 어쩌면 통상의 용법을 넘어서는 보다 깊은 이해가 가능하리라 봅니다. (146)

3.
먼저, 사이버네틱스라는 개념의 정의는 어떻습니까? 사이버네틱스가 무엇인가요?

정의를 추구하는 것은 별로 달갑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늘 개념적 제약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제게 책상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면 책상은 다리가 네 개이고 평평한 덮개를 갖고 있고 아이들이 뛰어 오를 수 있는 것이라고 답할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책상과 조랑말과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설명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끝에 가서는 살아있는 존재와 살아있지 않은 것 간의 차이에 대해 말해야 할 겁니다. 결과는 이미 알려져 있습니다. 모든 정의라는 것은, 제가 볼 때, 배제하고 한계 짓는다는 근원적인 약점을 갖고 있습니다. (165)

4.
문제는 그런 이름표들이 상호이해와 상호 귀 기울임을 방해한다는 점입니다. 지금 그것이 구성주의라 불리건, 음주주의 혹은 갈채주의라 불리건, 어떤 철학적인 범주에, 아니면 다른 범주에 엮여 들어가건 그 귀결점은 사람들이 사물 자체를 너무 성급한 이름표로 수습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름표가 인간의 사유에 너무 강한 방향성을 부여해 버린다는 말입니까?

그 이상입니다. 이름표는 전체 사고를 말살시킵니다. 곧바로 클럽이 생겨나고 사람들은 그게 좌냐 우냐 상위 범주인가 아니면 하위 범주인가 혹은 차별화해야 하는가 하는 식으로 서로 다툽니다.
제 생각에 구성주의라는 이름은 (구성주의) 이면에 있는 사유의 세계에서는 아주 끔찍한 재난에 지나지 않습니다. 구성주의라고 불리는 것은 다만 실재의 당연성을 회의하는 하나의 회의론적 태도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유방식에 주의를 모을 수도 있으며 이미 주어진 판단이나 사고방식으로부터 벗어날 수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이게 제가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발명품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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