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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알다시피. 나는 내 학생들에게 그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고, 그들을 성찰과 지각의 다른 가능성들에로 이끌려고 노력했습니다. 내 견해는 이렇습니다. '일정한 방식의 삶과 (그 삶의 방식이 출현하고, 또 그 자신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는) 욕망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은 주저함 없이 그것을 살아야 한다. 기다림은 아무 쓸모가 없다.'(함으로 288)
2.
나는 다시 한 번 반복하고 싶습니다. 나는 무엇이건 사랑을 장려할 의향은 가지고 있지 않지만, 정말로, 사랑이 없다면 사회현상들은 있을 수 없다고 강력히 주장하는 바입니다. (366)
3.
선생님이 규칙들과 규범들을 정식화하는 것을 단호히 거부함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같이 우리의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기독교의 계율과 어떤 유사성을 찾는 사람들에게 선생님은 무어라고 이야기해 주시겠습니까?
예수는 이웃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전쟁들과 파멸들에 연루되어 온 기독교 교회들은 예수가 말한 것을 2천 년동안이나 계율로 해석해 왔습니다. 우리는 오히려 이렇게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만일 우리의 이웃을 신뢰할 수 없다면, 우리는 항상 총을 준비해 두어야 하고 방아쇠 위에 손을 얹어 놓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물음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정말 그것을 원하는가? 우리는 밤낮으로 총을 들고 돌아다니기를 원하는가? 불안과 불신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살기를 원하는가?' 만일 이것이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그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자신들의 이웃들을 사랑해서도 안 되고, 그들을 신뢰해서도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이웃들도 마찬가지로 그들을 불신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무기 휴대를 위한 분명한 이유가 만들어집니다. 역으로 만일 당신이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는 식으로 행동한다면, 이번에는 당신이 그들로부터 존중을 받을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어린이를 신뢰한다면, 그 아이가 이번에는 당신을 신뢰할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지금, 우리가 직접 체험하고 경험하고 싶지 않은 것을 타자들에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견해를 지지하고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기회주의일 뿐이지 사랑이 아닙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우리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감으로써 살아가는 세상을 내어 놓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든 우리는 바로 그것을 해야 합니다. (함으로 338)
4.
<너는 저 열매를 먹지 말라......> 불안에 사로잡힌 무지한 아담은 이 말을 금지의 표현으로 듣는다. 그러나 정작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담이 먹을 경우에 그 아담을 중독시키게 될 과일이다. 그것은 두 신체의 만남, 각각을 특징짓는 관계들이 서로 결합되지 않는 만남이다. 과일은 독처럼 작용할 것이다. 다시 말해 과일은 아담의 신체의 부분들을 (그리고 이에 평행하게 과일의 관념은 아담의 영혼의 부분들을) 그의 고유한 본질에 더 이상 상응하지 않는 새로운 관계로 들어가도록 결정할 것이다. 신은 그에게 단지 과일의 섭취가 낳을 자연적 귀결을 드러냈을 뿐인데, 아담은 원인들을 모르기 때문에 신이 자신에게 어떤 것을 도덕적으로 금지한다고 믿는다. 스피노자는 이것을 집요하게 상기시킨다. (스피노자의 철학 38)
5.
세상 사람들은 모두 아름답게 보이는 것을 아름다운 것이라 여기고 있지만 그것은 추한 것일 수도 있다. 모두가 선하게 보이는 것을 선한 것이라 여기고 있지만 그것은 선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본시 유(有)와 무(無)는 상대적인 뜻에서 생겨났고, 어려운 것과 쉬운 것도 상대적인 입장에서 이루어지며, 긴 것과 짧은 것도 상대적으로 비교하는 데서 있게 되고, 높은 것과 낮은 것도 상대적인 관념에서 있게 되며, 음악과 소리도 상대적인 소리의 조화의 구별이며, 앞과 뒤도 상대적인 개념의 구별에 불과하다.
그래서 성인은 무위(無爲)하게 일에 처신하며, 불언(不言)의 가르침을 행하는 것이다. 만물을 생성케 하면서도 얘기하지 않으며, 생겨나게 하고서도 그것을 소유하지 않으며, 그렇게 되도록 하고서도 그것에 의지하지 않으며, 공로를 이룩하고서도 그것을 자랑하지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 공로를 자랑하지 않기 때문에 공로가 그에게서 떠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도덕경 2장)
6.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진리의 검증을 어떻게 합니까? '아, 그거 무슨 경에 있다.' '아무게 논문에 있더라.' '백과사전에 있다.' '신문에 났더라.' '우리 스님이 말했어.' '목사님이 말했어,' 성경에 있어.' '옛날부터 그래왔어.' 이렇게 자기 바깥의 다른 어떤 것들을 끌고 와 증거 삼아 진리를 검증하려 듭니다.
그러나 진리는 이런 것으로 검증될 수 없습니다. 불립문자입니다. 문자가 필요 없다는 게 아니라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 즉 문자를 절대화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바깥의 것들을 다 놓아버린 경지에서 바로 자기 마음에 계합해야 합니다. 자기가 바로 체험해야 합니다. 그래야 흔들리지 않는 경지로 나아길 수 있습니다.
(지금 여기 깨어있기 24)
7.
구조적으로 결정된 체계들 - 인간들 - 은 제한된 방식으로 통제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들을 섭동할 순 있지만 통제할 순 없습니다. 강요는 원리상, 승산이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내 테제는, 선생님이 독재 권력의 개념적 토대를 제거하는 인식론을 발전시켜 왔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 테제를 강력히 지지할 뿐더러, 내가 독재의 개념적 토대들을 파괴할 수 있다는 점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내 작업으로 인해 나는 민주주에 대한 보다 심도 깊은 이해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민주주의가, 자기존중과 타자들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참여와 협력이 가능할 수 있는 '더불어 살기'의 공간으로서 매일 새롭게 창조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독재가 파괴하는 첫 번째의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인의 자기 존중과 자율입니다. 독재는 살아 있음의 대가로 복종와 순종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289)
'내가 써 온 것'은 - 독재가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 자기존중의 가능성을 위한 새로운 토대를 제공합니다. 내 저작을 읽은 독자들이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모두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창조에 불가피하게 참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내가 사람들이 강제나 대가 없이 시도해보도록 초대하는 견해 - 개인의 가치를 평가하는 견해 - 입니다. 그리고 진가를 인정받고 존경받는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들 자신의 진가를 인정하고 존경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하는 것'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함으로 289)
8.
선생님은 어떤 운명적인 영웅주의를 옹호하지 않고, 복종하는 사람들을 비난하지 않으며, 권력을 다루는데 있어서의 최대한의 깨달음을 주장합니다.
당연히 그렇습니다. 당분간 복종하고 되받아칠 적절한 기회를 기다리지 않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 될 수 있습니다. 나의 근본적인 요점은 우리의 책임을 선언하는 것이고 타자들이 완전한 깨달음을 가지고 행동하도록 초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타자들에게 권력을 부여할 때 나타나는 세계를 우리는 원하는가? 우리가 우선 살아남기를 원하는가? 권력을 무제한적이고 강경한 방식으로 행사하는 것을 통해 출현하는 세계를 우리가 거부하는가?(함으로 285)
9.
만일 당신의 평가가 옳다면, 그렇다면 나는 내 생각이 왜곡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매우 분명하게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속임수를 쓰면서 그러한 시도들을 할 때 나의 작업은 보다 인간적인 형태의 삶을 창조하는 데 활용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이익들을 위해, 개인들의 치부를 위해 착취되는 것입니다. 우리 문화의 지배 우상들, 능률 지향, 광인 통제, 그리고 성공에의 열망을 섬기기 위해 착취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가능한 한 많은 인간들의 복리를 위해 나의 작업을 이용할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 이러한 발전들을 받아들이고 또 인간 본성에 대한 나의 믿음을 유지하는 것 외에 내가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만일 내가 내 생각의 남용을 막으려고 시도했다면, 나는 불가피하게 폭군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 결과 인지 생물학과 사랑의 생물학을 부정하게 되었을 것입니다.(205)
10.
그것은 내 문제가 아닙니다. 나는 누구도 확신시키고 싶지 않고, 사람들을 순환적인 세계관을 갖도록 바꾸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혁명가가 아니며 내 자신을 세계를 변화시키는 임무를 갖고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나는 단지 어떠한 과정들이 어떻게 해서 어떠한 존재[실체]들을 산출하는지 보여주고 싶을 뿐입니다. 그게 답니다. 나는 오늘도, 내가 마치 무한한 양의 시간을 가진 것처럼, 급하거나 서두르지 않고, 나만의 속도에 맞춰 움직이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젊었을 적에는 -심지어 60년대 초반에는- 사정은 어쩌면 이와 달랐습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내 견해들을 확신시키고자 했습니다. 나는 이제 이러한 의도에서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날 한 친구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네가 사람들을 확신시키려 애쓰면 애쓸수록, 너는 점점 더 믿을 수 없게 되는 거야.' 나는 그가 옳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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