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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수준의 개념을 예를 들어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맹점에 대한 실험을 생각해 봅시다. 한쪽 눈을 별에 고정시킵니다. 그래도 검은 점은 보입니다. 그러나 눈으로부터 일정 정도 멀어지면 검은 점은 사라집니다.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지요.

생리학적 설명에 따르면, 검은 점은 일정한 거리에서 망막의 특정 지점에 맺히는데 그곳에는 신경세포가 없고 그 지점은 시신경이 모여서 눈을 떠나는 곳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리학적 논의를 가지고서도 아직 설명하지 못하는 것은 왜 사람들은 맹점을 보지 않는가? 그리고 왜 우리는 맹점의 존재에 대해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하는가?하는 질문입니다. 시야(보이는 영역)는 우리에게 항상 닫혀있는 것(폐쇄된 것)으로 나타납니다. (볼 수 있는 것만 보니까) 볼 수 없는 곳이 없는 듯이 나타나는 거지요. 달리 말해서, 우리는 우리가 보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눈멀음에 대해서 눈이 멀어 있습니다. 이것은 2차 수준의 문제 틀에 대한 예입니다. 그러니까 보지 않음은 자기 스스로에게 (보지 않음에) 적용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중부정(보지 않음을 보지않음)이 긍정을 낳지는 않습니다. 보지 않음을 본다고 해서 이제는 본다는 것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이는 2차 수준의 개념들의 논리가 전통 논리와 맞지 않음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전통 논리에서는 두 번의 부정은 원래 긍정을 낳아야 하니까요. (186)

2차 수준의 개념이 당신이 선택한 예에서는 부정으로부터 설명됩니다. 부정의 관점으로부터 '우리는 우리가 보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지 않는다'라고 하는 (부정의) 자기적용의 문제가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지요.

전적으로 옳습니다. 물론 긍정으로부터 설명을 찾을 수도 있겠지요. 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에서의 목적 혹은 목표 개념을 생각해 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럴 경우 2차 수준의 관점으로부터 제기되는 물음은 '목적의 목적은 무엇인가?' '목표의 목표는 무엇인가?' '왜 도대체 목적에 대한 생각이 도입되는가?' 등이 되겠지요.
제가 비행기를 타고 갈 때에 저는 늘 제 주변에 앉은 사람들을 관찰하고 그들이 신발 끈을 어떻게 묶었는지를 살펴봅니다. 비행기가 출발하면 그들은 신발을 벗었다가 목적지에 가까워지면 그들은 다시 신발을 신습니다. 그들은 신발 끈을 구멍에 넣으면서 열손가락으로 기묘한 춤을 춥니다. 매듭을 만드는 거지요. 그들을 관찰해보면 그들 각자는 각자의 방식으로 서로 다른 춤을 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매듭을 만드는데 모두들 서로 다른 손가락의 움직임을 보입니다. 물리학자라면 손가락의 미분방정식을 적어 내려 갈 겁니다. 그리고 정말로 다양한 방정식들을 얻을 겁니다. 그래서 손가락 춤의 현상을 설명 불가능한 것으로 여길 겁니다. 그렇지만 목적론적인 관점에서 보면 손가락의 춤사위는 정말 간단하게 설명됩니다. 손가락의 움직임은 매듭을 묶어 신발을 조이는데 사용된다고 말이지요. 목적에 대한 생각은 (2차 수준의 관점에서 보면) 이 경우 엄청난 단순화와 설명의 명료함을 만들어 내지요. 이게 목적의 목적입니다. (발명품 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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