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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슬퍼할 일도 기뻐할 일도 아니며 더러운 것도 깨끗한 것도 아니며 긴 것도 아니고 짧은 것도 아니다.

사실이 그러한데 슬퍼하거나 기뻐하거나 더러워하거나 깨끗해하거나 길다고 하거나 짧다고 한다면 그 작용은 나에게, 나의 마음에, 나의 연산작용에 의해서다.

나의 연산작용, 나의 선호.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을 관찰하고 그 마음에 매이지 않는다면, 왜냐면 사실은 아무 것도 아니니까. 아무 것도 아닌 것에 매여 괴롭고, 슬픈 정념에 사로잡힌다면, 헛 일임을 바로 알 것이다. 모든 집착을 끊을 수 있는 이유다. [환상처럼 보기]



2.

옛날에 어질고 현명한 왕이 있었다. 연일 국정에 몰두하던 왕이 모처럼 짬을 내 신화들과 함께 사냥을 떠났다. 아침 일찍 떠났다가 저녁에 환궁할 요량이었는데, 사냥에 심취한 나머지 미처 해가 기우는 것을 알지 못했다. 날이 너무 어두워 궁궐까지 갈 수가 없었다. 충직한 신하들은 얘가 탔다. 왕이 말했다. 저기, 저 민가에 하루 묵도록 하자. 신하들은 펄쩍 뛰며 두 팔을 내 저었다. 어떻게 전하께서 누추한 여염집에 들 수가 있겠느냐며, 밤길을 재촉해서라도 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그때 왕이 말했다.

"내가 저 집에 들어가면, 내가 백성이 되겠느냐 아니면 저 집이 궁궐이 되겠느냐."

『문학동네 20호, 1999년 가을, <박상륭 인터뷰>』

T.

내가 저 집에 들어가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저 집에 들어가면 내가 백성이 되겠느냐 아니면 저 집이 궁궐이 되겠느냐.

[조견 오온개공 도일체고액
이무소득고 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3.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어려움의 핵심은 바로 앎을 잘못 아는데, 앎을 모른는데 있다. 우리를 얽어매는 것은 앎이 아니라 앎의 읾이다. 폭탄이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앎이 아니라, 우리가 폭탄으로 무엇을 하려하는냐가 그것을 쓰느냐 마느냐를 결정한다. 우리는 흔히 이런 깨달음을 무시하거나 못 보게 스스로 억누르면서, 우리의 일상행위에 대한 책임을 떠맡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우리의 행위는 (우리의 모든 일상행위는 빠짐없이) 세계를 산출하고 굳히는 데 이바지 한다. 우리가 타인과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세계를 산출하는 바로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되는 것이다. 우리 행위의 초월성을 보지 못하면, 우리가 부응하고자 하는 상(像)과 실제로 산출하는 존재를 혼동하게 된다 .이런 잘못은 오직 앎을 알아야만 고칠 수 있다.
(앎의 나무 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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