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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들의 조정의 조정/행위의 순환적인 조정
1.
언어 사용의 '원 상황'은 일상적인 상황입니다. 2차선 도로의 가장자리에 서서 택시를 잡으려 애쓰고 있는 사람을 상상해 보세요. 제 방향으로 지나가는 택시들은 전부 승객이 타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마침내 반대쪽에서 달리고 있는 택시를 세우려고 애씁니다. 그리고 성공적으로 눈을 마주친 다음 택시 기사에게 다시 허공의 원을 그리면서 손짓을 합니다.
그럼 택시 기사는 방향을 바꾸어서.....
바로 그렇습니다. 그 손짓 때문에 택시 기사가 차선을 바꾸고 승객을 맞으러 오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이제 당신은, 예를 들어 당신이, 도로의 진행 방향에 갑자기 나타나 정차한 다른 택시를 그 사람이 이용하기로 결정한다는 것을 관찰할때, 그리고 반대편에서 차를 돌린 먼저의 그 택시 기사가 그에게 "거기서 날 불러 놓고 지금 왜 그 택시를 잡는 거죠?라고 소리칠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즉각적으로 알아챌 것입니다. 겨우 눈이 한 번 마주쳤고, 두 번의 팔 동작이 있었을 뿐이지만, 그것들은 발화들로 이해되었습니다.
2.
여기에서 일어난 일이 '행위들의 조정의 조정'입니다. 첫 번째 팔동작과 눈이 마주친 순간에서, 택시 기사와 잠재적인 승객은 호혜적인 관계와 경계에 놓이게 됩니다. 그 승객이 허공에 그린 두 번째 팔동작은 그들의 조정이 조정되도록 만듭니다. 요컨대, 상호작용의 흐름 속에 이러한 '행위들의 조정의 조정'이 존재하는 때에는 언제나 언어가 존재합니다. 나는 이것들이 우리가 언어가 일정한 상황 속에서 사용된다고 말할 수 있기 위해 필수적인 과정들이라고 주장하는 바입니다.(143)
3.
분명 꿀벌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조정합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문제는 그들이 행위의 조정 역시 조정하느냐하는 것입니다. 순환[재귀]의 현상들이 존재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꿀벌은 자기가 애석하게도 잘못된 방향으로 날아갔었노라고 다른 꿀벌에게 말할 수 있을까요? 만일 진짜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꿀벌들을 언어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들로 분류해야만 할 것입니다.(144)
4.
'이 행위들의 조정의 조정에는 하나의 순환이 있다. 이것은 그 이전의 적용의 결과들에 적용되는 주기적인 작동이다.' 내가 언어를 이해하는 데 이 요인이 왜 그렇게 중요할까요? 나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나의 순환을 관찰할 수 있을 때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이 존재한다. 이러한 종류의 주기적인 작동들이 있을 때마다 새로운 현상들이 존재한다.
5.
내 주장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행위의 순환적인 조정, 즉 행위의 조정의 조정에서의 흐름과 마주칠 때마다, 우리는 새로운 것, 즉 언어가 출현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언어가 출현할 때 대상들이 출현합니다. 예컨대 택시 같은 것 말입니다. 택시란 무엇입니까?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행위의 두 번째 조정(첫번째 순환)에 의해 조정을 이룬 행위의 조정으로서의 승객을 태우는 수송 및 운전은 행위의 세 번째 조정(두 번째 순환) 속에서 택시라고 "이름 붙여져"나타나는 행위의 그러한 배치가 된다.' 이것은 (택시가 수송[실어나름]을 모호하게 하는 것처럼) 대상들이 자기들이 조정하는 행위를 모호하게 하는 '행위의 조정들의 조정'으로서 출현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146)
6.
이것은 언어가 정보 전송의 수단이 아니라, 그리고 소통 체계가 아니라 '행위의 조정들의 조정'의 흐름 속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방식이자 방법임을 드러내 줍니다. 이것은 상호작용하는 체계들의 구조적 결정론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일단 이것이 파악되고 나면 상징들이 언어의 시초가 아니라, 역으로 언어가 상징들의 기원이라는 점이 분명해집니다. 모든 것이 뒤집어집니다.
7.
잠깐 우리가 체계들의 상호작용 및 언어현상과 관련한 우리 대화의 앞머리에서 논의했던 인터뷰 약속이라는 핵심적인 사례로 돌아가 볼까요? 당신이 칠레로 오기 전에 우리가 나눴던 전화 통화는 함부르크에서 산티아고로, 또는 산티아고에서 함부르크로 이어지는 정보 전송이 아니었습니다. 그러한 상호작용의 결정적인 결과는 두 개의 '구조적으로 결정된' 체계들-푀르크젠과 마뚜라나-이 그들의 행위의 순환적인 조정을, '행위의 조정들의 조정'을 이루어 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여기에 함께 앉아 있는 것입니다.(147)
1.
언어 사용의 '원 상황'은 일상적인 상황입니다. 2차선 도로의 가장자리에 서서 택시를 잡으려 애쓰고 있는 사람을 상상해 보세요. 제 방향으로 지나가는 택시들은 전부 승객이 타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마침내 반대쪽에서 달리고 있는 택시를 세우려고 애씁니다. 그리고 성공적으로 눈을 마주친 다음 택시 기사에게 다시 허공의 원을 그리면서 손짓을 합니다.
그럼 택시 기사는 방향을 바꾸어서.....
바로 그렇습니다. 그 손짓 때문에 택시 기사가 차선을 바꾸고 승객을 맞으러 오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이제 당신은, 예를 들어 당신이, 도로의 진행 방향에 갑자기 나타나 정차한 다른 택시를 그 사람이 이용하기로 결정한다는 것을 관찰할때, 그리고 반대편에서 차를 돌린 먼저의 그 택시 기사가 그에게 "거기서 날 불러 놓고 지금 왜 그 택시를 잡는 거죠?라고 소리칠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즉각적으로 알아챌 것입니다. 겨우 눈이 한 번 마주쳤고, 두 번의 팔 동작이 있었을 뿐이지만, 그것들은 발화들로 이해되었습니다.
2.
여기에서 일어난 일이 '행위들의 조정의 조정'입니다. 첫 번째 팔동작과 눈이 마주친 순간에서, 택시 기사와 잠재적인 승객은 호혜적인 관계와 경계에 놓이게 됩니다. 그 승객이 허공에 그린 두 번째 팔동작은 그들의 조정이 조정되도록 만듭니다. 요컨대, 상호작용의 흐름 속에 이러한 '행위들의 조정의 조정'이 존재하는 때에는 언제나 언어가 존재합니다. 나는 이것들이 우리가 언어가 일정한 상황 속에서 사용된다고 말할 수 있기 위해 필수적인 과정들이라고 주장하는 바입니다.(143)
3.
분명 꿀벌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조정합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문제는 그들이 행위의 조정 역시 조정하느냐하는 것입니다. 순환[재귀]의 현상들이 존재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꿀벌은 자기가 애석하게도 잘못된 방향으로 날아갔었노라고 다른 꿀벌에게 말할 수 있을까요? 만일 진짜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꿀벌들을 언어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들로 분류해야만 할 것입니다.(144)
4.
'이 행위들의 조정의 조정에는 하나의 순환이 있다. 이것은 그 이전의 적용의 결과들에 적용되는 주기적인 작동이다.' 내가 언어를 이해하는 데 이 요인이 왜 그렇게 중요할까요? 나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나의 순환을 관찰할 수 있을 때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이 존재한다. 이러한 종류의 주기적인 작동들이 있을 때마다 새로운 현상들이 존재한다.
5.
내 주장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행위의 순환적인 조정, 즉 행위의 조정의 조정에서의 흐름과 마주칠 때마다, 우리는 새로운 것, 즉 언어가 출현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언어가 출현할 때 대상들이 출현합니다. 예컨대 택시 같은 것 말입니다. 택시란 무엇입니까?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행위의 두 번째 조정(첫번째 순환)에 의해 조정을 이룬 행위의 조정으로서의 승객을 태우는 수송 및 운전은 행위의 세 번째 조정(두 번째 순환) 속에서 택시라고 "이름 붙여져"나타나는 행위의 그러한 배치가 된다.' 이것은 (택시가 수송[실어나름]을 모호하게 하는 것처럼) 대상들이 자기들이 조정하는 행위를 모호하게 하는 '행위의 조정들의 조정'으로서 출현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146)
6.
이것은 언어가 정보 전송의 수단이 아니라, 그리고 소통 체계가 아니라 '행위의 조정들의 조정'의 흐름 속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방식이자 방법임을 드러내 줍니다. 이것은 상호작용하는 체계들의 구조적 결정론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일단 이것이 파악되고 나면 상징들이 언어의 시초가 아니라, 역으로 언어가 상징들의 기원이라는 점이 분명해집니다. 모든 것이 뒤집어집니다.
7.
잠깐 우리가 체계들의 상호작용 및 언어현상과 관련한 우리 대화의 앞머리에서 논의했던 인터뷰 약속이라는 핵심적인 사례로 돌아가 볼까요? 당신이 칠레로 오기 전에 우리가 나눴던 전화 통화는 함부르크에서 산티아고로, 또는 산티아고에서 함부르크로 이어지는 정보 전송이 아니었습니다. 그러한 상호작용의 결정적인 결과는 두 개의 '구조적으로 결정된' 체계들-푀르크젠과 마뚜라나-이 그들의 행위의 순환적인 조정을, '행위의 조정들의 조정'을 이루어 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여기에 함께 앉아 있는 것입니다.(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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