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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또한 다음을 함축합니다. '윤리적 참여는 우리 자신의 사회적 귀속 영역을 넘어 확장되지 않는다.'
이 표제기사에 비추어 본다면, 타자는 더 이상, 우리와 공통적인 것을 아무것도 갖지 않은 인간으로 보이겠군요.
그렇습니다. 전쟁에 연루된 당사자들에 있어서 윤리적 자극들을 파괴하는 한 가지 가능성은 상대방[적}을 인간들의 형상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적은 인간성을 박탈당하고, "하류인간"이자 "극단론자", "공산주의자"나 "나치"로 강등됩니다. 전쟁에 참여한 군인들에게 제시되는 지침들에는 '먼저 죽이고 나중에 생각하라'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타자를 정당화하는 영역, 즉 사랑의 영역을 모든 인간들을 보호하기 위한 방식으로 기꺼이 확대하려는 사람들만이, 차별적 명명법들에 휘둘리기를 거부하는 사람들만이 각각의 그리고 모든 개인들의 운명에 의해 마음이 움직일 수 있고, 그들을 자신들의 성찰들 안에 포함시킬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의 행위들이 사랑에 의해 인도된다면 우리는 어떤 식으로 더불어 살 수 있을까요?
사태에 대해 철저하게 이야기하고, 문제들을 함께 토론하고 연구하며, 다른 사람들과 관련된 공통의 과제를 수행하는데 참여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누구도 자신의 존재에 대해 사과할 필요가 없을 뿐더러 사람들은 사회적 영역의 특징들을 갖고 있는 협력의 영역에 존재해야 합니다. 좀 더 일반적인 말로 표현해 보자면, 우리는 여기에서 민주주의를 보는바 사랑은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 근본적인 특징들은 자신과 서로를 존중하면서 공존의 기획과 형태 위에서 더불어 살아가고 더불어 작업하는 인간들-시민들-을 포함합니다. 군주제나 독재에서 시민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의미심장하지 않습니까? 여기에서는 사람들이 무조건적으로 명령에 따르고 복종할 것을 강요받습니다. 한 나라의 왕이나 폭군이 아무리 우호적으로 또는 공손하게 자신을 드러낸다 하더라도 여기에서 사람들은 신민이나 노예일 뿐이지 시민이 아닙니다. (함으로 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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