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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믿음에 익숙해져라. 왜냐하면 모든 좋고 나쁨은 감각에 있는데, 죽으면 감각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죽음이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사실을 제대로 알게 되면, 가사성(可死性)도 즐겁게 된다. 이것은 그러한 앎이 우리에게 무한한 시간의 삶을 보태어주기 때문이 아니라, 불멸에 대한 갈망을 제거시켜주기 때문이다. "죽음은 두려운 일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진정으로 깨달은 사람은, 살아가면서 두려워할 것이 없다. 그러므로 "내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죽을 때 고통스럽기 때문이 아니라, 죽게 된다는 예상이 고통스럽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헛소리를 하는 셈이다. 왜냐하면 죽음이 닥쳐왔을 때 고통스럽지 않은데도 죽을 것을 예상해서 미리 고통스러워하는 일은 헛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장 두려운 악인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우리와 함께 있지 않으며, 죽음이 오면 이미 우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죽음은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 모두와 아무런 연관이 없다. 왜냐하면 산 사람에게는 아직 죽음이 오지 않았고, 죽은 사람은 이미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때로는 죽음을 가장 큰 악이라고 생각해서 두려워하고, 다른 때에는 죽음이 인생의 악들을 중지시켜준다고 생각해서 죽음을 열망한다. 반면 현자는 삶을 도피하려고 하지도 않으며, 삶의 중단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삶이 그에게 해를 주는 것도 아니고, 삶의 부재가 어떤 악으로 생각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음식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현자는 단순히 긴 삶이 아니라, 가장 즐거운 삶을 원한다. 그래서 그는 가장 긴 시간이 아니라 가장 즐거운 시간을 향유하려고 노력한다.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44)

아름다운 플레이
1.
에피쿠로스의 충고는 명심해야겠다. "단순히 긴 삶이 아니라 가장 즐거운 삶을 원한다." 나라면 이렇게 말하지, 가장 원하는 건, '아름다운 플레이'라고.
2.
죽는다는 게 두려운 게 아니라 죽는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기 때문에 두렵다고 한다면 죽는다는 생각을 내려놓으면 두렵지 않다. 생각을 내려놓으란 말은 피상적이다.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 동안은 두렵지 않을 것이다. 죽음을 생각하는 동안에는 죽음이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믿음에 익숙해져라. 또는 죽음이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님을 확실히 아는 것이다. 확실히 안다는 것은 철학하는 수고가 필요하다. 두려운 생각이 나기 전에, 생각을 미리 결정해 놓아야한다. 이러면 곧 죽음에 대한 나의 선택이고 책임이다. 죽음 앞에 담대함은 미리 결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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