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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은 그릇의 모양에 따라 그 형태가 바뀝니다. 스스로 어떤 모양이 되겠다는 아무런 의지도 작용하지 않습니다. 또한 텅 비어 있는 그릇은 거기에 무엇을 담는가에 따라 그 인연에 조응해서 밥을 담으면 밥그릇이 되고 국을 담으면 국그릇이 됩니다.
그와 같이 여래는 모든 욕구를 여의었으니, 그 행은 물과 같고 그릇과 같은 무위의 행입니다. 어디에도 집착함이 없으므로 행함 없이 행하는 무소행無所行을 실천하고 무위의 모습으로 무주상보시를 행하여 무루복을 짓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행위는 언제나 목적에 집착하여 욕구를 따라다니는 유위의 행입니다. 매사를 분별의 잣대로 구분하고 욕구에 따라 생각을 일으키고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움직입니다. 욕구가 만족되면 마음이 흡족하고 그렇지 못하면 몹시 불쾌해 합니다. 깨끗함과 더러움을 분별해서 더러운 것은 버리고 깨끗한 것은 가지려 합니다. 그런 일로 늘 바쁘게 움직이는 게 중생의 삶입니다.
부처님은 깨끗함과 더러움을 분별하지 않으니 싫어하는 마음 좋아하는 마음이 일어날 여기가 없습니다. 더러워서 싫다고 갖다 버릴 것도 없고 깨끗해서 좋다고 챙겨 넣을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런 함이 없으며 수고할 일이 없습니다. 1
철학자는 금욕적인 덕목들- 겸손, 검소, 순수-을 독점하여, 그것들을 아주 특별하고 새로운, 실제로는 거의 금욕적이지 않은 목적들에 사용한다. 철학자는 그것들을 자신의 독특함의 표현으로 삼는다. 철학자에게서 그것들은 도덕적인 목적들도, 또 다른 삶을 위한 종교적 수단들도 아니며, 오히려 철학 그 자체의 <결과들>이다. 철학자에게는 또 다른 삶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겸손, 검소, 순수는 이제 아주 풍부하고 넘쳐흐르는 삶, 능력으로 충만한 삶의 결과들이 되어 사유를 정복하고 다른 모든 본능을 자신에게 종속시킨다. -이것이 바로 스피노자가 자연이라고 부르던 것이다: 욕구에 기초해서, 즉 수단과 목적에 따라서 영위되는 삶이 더 이상 아니라, 생산, 생산성, 능력에 기초해서, 즉 원인과 결과에 따라서 영위되는 삶. 겸손, 검소, 순수, 이것들은 그[철학자]에게는 현자가 되는 방식이고, 자신의 신체를 지나치게 오만하고 지나치게 사치스러우며 지나치게 육감적인 원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신전으로 만드는 방식이다. 그러나 철학자를 공격할 때, 사람들은 우습게도 겸손, 검소, 순수의 외양만을 공격한다. 그러나 이것은 무능력한 분노만을 배가시킬 뿐이다. 철학자는 어떤 빌미도 주지 않지만, 온갖 공격을 받는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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