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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는 조건을 맞추어 나를 바꾸는 길이 있는가 하면, 나는 그대로 두고 내게 맞는 조건을 선택하는 길도 있습니다. 이 두가지 길 가운데 어느 것이 좋고 나쁜가를 논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또 어느 한쪽만을 선택하면서 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주어진 조건을 바꿀 수 없는 상황이라면 나를 변화시키지 않을 수 없고, 주변 조건은 바꿀 수 있지만 내 성향은 바꾸기가 어려운 형편이라면 일단 나에게 맞는 상황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적당한 길을 선택하면 됩니다. 연을 따라 인을 바꾸거나 인을 따라 연을 바꾸면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근원적 관점에서 볼 때, 어떤 경계에 처하더라도 과보가 일어나지 않으려면 인을 소멸시키면 됩니다. 인과 연이 결합하지 않으면 과는 일어나지 않는데, 언제 어느 때건 내 의지로써 소멸시킬 수 있는 것이 인이기 때문입니다. 나라는 씨앗을 고집하지 않으면 씨앗이 씨앗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므로 아무런 걸림도 부딪침도 갈등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상에 집착하는 업식을 소멸하는 것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사라지면 어떤 상황과 마주쳐도 부딪칠 만한 것이 없습니다. 허공을 향해 칼을 휘둘러서는 아무 부딪침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상대가 아무리 날카로운 말을 하고 어떤 경계가 온다 해도 내가 상을 버려 허공처럼 텅 비어 있다면 상처 받을 일이 없습니다.
나를 비워서 인을 없앤다면 어떤 연을 만나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또한 상대의 입장에서 보면 내가 그의 연으로 작용하는 것이어서 그의 연을 텅 비워버리는 셈이니 상대가 어떤 인을 갖고 있더라도 그 인이 발현하지 못하게 됩니다. 선연善緣이라면 증강시키고 악연惡緣이라면 순화시킵니다. 이런 수행은 주변사람들을 모두 행복하게 합니다. 내가 행복해지는 길과 네가 행복해지는 길이 둘로 나뉘지 않고 한길에 놓여 있습니다. 1
- 법륜스님, <금강경 강의> p420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