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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유란,

나에게 좋은 것은 하고싶은 대로 하는 것이고, 나에게 나쁜 것은 하고싶어도 하지 않는 것이고

나에게 좋은 것은 하기싫어도 하는 것이고, 나에게 나쁜 것은 하기싫은대로 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러할 때 나는 하고싶다와 하기싫다에 매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고싶다고 반드시 해야하는 것도 아니고

하기싫다고 무조건 하지않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하고싶다와 하기싫다로 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이런 자유는 하고 싶은데 하지 못하는 괴로움이나 하기싫은데 해야하는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나는 이것을 삶과 동행하는 자유라고 부르는데, 나는 실로 이렇게 살고 싶다.

 

다음으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이에 대해선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탐구할 필요가 있다.

삶과 동행하는 자유가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분하려면 우리의 신체에 대한 사유가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우리에게서

그것을 구분하는 것은 다름아닌 신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나에게 이로운 것은 '기쁨'이고 나에게 해로운 것은 '슬픔'이란 말만 해둔다. 스피노자의 <에티카>는 정말 놀라운 책이다. 정말로 자유롭고 싶다면 스피노자를 반드시 만날 것이다.

 

다음으로 이런 문제. 나의 자유는 당연히 기쁨을 향한다. 그런데 하고싶은 대로 했는데 다음날 마음과 기분이 슬퍼져 괴로울 때가 있다. 왜 그럴까? 앞에서 말한 나에게 나쁜 것은 하고싶어도 하지 말아야하는 경우를 어긴 것일까? 하고싶다는 욕망과 하기싫다는 욕망은 그자체로는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다. 공하다. 다만 그것이 나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가 아니면 나쁜 영향을 주는가가 문제일 뿐이다. 혹 하고싶어도 하지말하야하는 이유는 욕망이 나쁜 것인가? 그래서 참아야하는 것인가?  욕망 자체가 나쁘다고는 할 수 없다. 그것은 모순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전 글[욕망에 관하여]을 통해 욕망에는 과정이 있음을 주목했다. 꽃을 피우려는 욕망은 그 부단한 수고와 단계적 시간을 겪지 않으면 성취될 수 없다. 나는 이런 과정을 무시하는 것이 욕심이라 생각한다. 욕심은 욕망을 왜곡한다. 그리고 두번째 욕심과 함께 쾌락 또한 욕망의 내재적 과정을 중단시킴을 발견한다. 들뢰즈는 '욕망과 쾌락 '이란 글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1) 나는 쾌락에 어떤 긍정적 가치도 부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쾌락은 욕망의 내재적 과정을 중단시키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쾌락은 지층들과 조직의 편에 서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욕망이 내부적으로는 법칙에 복종적이고 외부로부터 단절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쾌락에 의해 야기되는 동일한 움직임 안에서이다. 이 두가지 경우 모두에서 욕망에 고유한 내재성의 장은 부정된다. 미셸이 사드에게 중요성을 부여했던 반면 나는 마조흐에게 중요성을 부여했던 것이 단지 우연만은 아니다. 내가 마조히스트라고 말하거나 미셸이 사디스트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것은 그럴 듯하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사실이 아니다. 마조흐가 나의 관심을 끄는 이유는 '고통' 때문이 아니라, 쾌락이 욕망의 긍정성과 내재성의 장의 구성을 중단시킨다는 생각 때문이다.(같은 방식으로, 아니 차라리 다른 방식으로 궁정식 연애에서 내재성의 장 또는 기관 없는 신체의 구성을 들 수 있는데, 이 경우 욕망에는 어떠한 결핍도 없고 욕망은 그 과정을 중단시킬 모든 쾌락들로부터 자유롭다). 내가 보기에 쾌락은 한 사람, 혹은 한 주체로 하여금 자신을 뛰어넘는 과정 속에서 '스스로를 재발견할' 수 있게 해줄 유일한 수단이다. 그것은 재영토화이다. 그리고 나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욕망과 동일한 방식으로, 결핍의 법칙 및 쾌락의 규범과 연관되어 있다.[각주:1]

 

내가 마음껏 욕망하라라고 말할 때는, 적어도 두가지 덫이 있음을 명심해야한다. 하나는 욕심이고 또하나는 쾌락이다. 이 둘은 욕망의 내재적 과정을 중단시킨다. 욕망이 쾌락과 구분되야하는 것은 예컨대 성욕을 예로 들어 돈으로 사는 성은 욕망의 내재적 과정을 중단하시는 쾌락이다. 여기서 쾌락에 어떤 긍정적 가치도 부여할 수는 없다. 괘락이 문제이지 욕망이 문제가 아니다. 이와 결부지어 나에게 나쁜 것은 하고싶어도 하지말아야되는 경우에서, 하고 싶어도 하지 말아야할 것은 쾌락이고 나에게 나쁜 것은 욕망의 내재적 과정의 중단이라 정리할 수 있겠다. 욕망이 중단된다는 것이 쾌락을 유통시키는 구조와 쉽게 겹치면 욕망은 당연히 꽃을 피어보기도 전에 왜곡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성[욕망]을 상품화하는 것이 아니라 쾌락을 유통시킨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 같다. 반면 성인이라 일컬어지는 사람들은 욕망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쾌락을 거부하는 것이 아닐까, 화담 서경덕의 경우를 보면 황진이의 노골적인 하룻밤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던 서경덕은 그 일을 계기로 황진이의 사랑을 독차지 하게 되는데, 서경덕은 욕망의 내재적 과정을 완성해나갈 줄 아는 사람이었으며, 그에게는 들뢰즈가 말한 궁정식 연애처럼 "이 경우 욕망에는 어떠한 결핍도 없고 욕망은 그 과정을 중단시킬 모든 쾌락들로 부터 자유로웠던 것"이 아니었겠는가!

 

이상에서 다시 정리하면 자유를 위해선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분하고 욕망을 이해해야한다. 마음껏 욕망하라고했지만 마음껏 욕망하기란 쉽지가 않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 나는 실험실의 연구원처럼 나는 나의 삶을 모델로 실험해 나갈 것이다.

 

 

 

 

 

 

 

 

 

  1. .『탈주의 공간을 위하여』,「욕망과 쾌락」p111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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