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명제 1. [모든 존재는] 공하다.
명제 2. [모든 존재는] 인연이다.
명제 3. [대상과 주체는] 하나이다.
공하다는 것과 인연이다는 것은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
공하므로 어떤 인연도 가능하다. 원래 정해진 것이 없으니 인연은 무한한 가능성으로 펼쳐질 수 있다.
가령 내 몸은 공하다. 하루동안 나는 집에서는 가족의 인연으로 아빠이고, 직장에서는 직장의 인연으로 사장님이고, 버스를 탔을 때는 손님이고... 등등 나의 몸은 하루에도 여러 인연의 장에 들어서면서 그 인연이 바뀐다. 사람들은 이렇게 다 그 인연을 따라 이룬다. 문제는 인연의 장에 맞게 행동하지 않을 때다. 가령 버스에 타서 사장행세를 한다면 곤혹스럽고, 지하철에 타서 집에서처럼 눕는다면 문제이다. 즉 하나를 고집하고 집착하면 문제가 발생한다.
공은 내재성의 장이며 인연은 그 위에서 생성되고 사라지고 이어지고 끊어지고 한다. 공은 수없는 인연이 발생하는 인연의 장이며, 공과 인연은 둘이 아닌 하나다. 공위에서 인연은 얼마든지 바뀐다. 인연은 배치인데, 가령 비행기의 인연 또는 배치는 승객과 승무원으로 만나고 기장이 배치되고 비행술이 하늘을 만나는 비행기의 배치가 비행기의 인연이고 비행기다. 이 비행기의 인연이 하이잭 테러범에 의해 납치가 되면 순간 비행기는 감옥의 인연으로 바뀐다. 테러범-인질-밀폐된 공간-감옥-하늘의 배치로 일순간 바뀐다. 승객이 인질로 변하는 배치를 만나 비행기가 감옥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인연이 바뀌는 배치는 당연히 수도 없이 많다. 학교의 교실은 식당의 배치가 되기도 하고 회의실의 배치가 되기도 하고 때론 무도회장의 배치로 그 인연을 따라 수시로 변한다. 이는 교실이 공하기 때문이다. 교실도 인연이다. 공간은 공간일 뿐이고 우리가 인연을 따라 모양과 이름을 붙인다.
이로서 공하다는 것과 인연이다는 것이 둘이 아닌 하나임을 말했고 다음으로 대상과 주체가 둘이 아닌 하나임을 생각해보자.
교실은 인연이고 교실 자체는 공간일 뿐이다. 우리가 공간을 교실로 아는 것, 보는 것은 우리와 교실이 둘이 아닌 하나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우리가 한 공간을 교실이라고 부를 때, 존재는 공하므로 그 공간은 공간일 뿐이고 그 공간이 교실로 불리는 것은 교실의 인연의 배치를 이룰 때 교실이 된다. 교실은 앞서 밝혔듯이 배치를 따라 얼마든지 다른 인연의 공간을 바뀔 수 있는데, 우리가 교실을 교실로 보는 것은 교실과 그 공간에 온몸(眼耳鼻舌身意)으로 접속하는 내가 하나 일때 가능하다. 교실은 공하기에 최초의 교실은 없다. 교실의 배치가 자리잡고 이를 감각하면서 교실의 개념이 우리 마음에 생기고 마음은 비로소 교실을 본다. 이렇게 교실과 내가 하나가 아니면 교실은 성립되지 않는다. 다른 예를 들면 누군가에게는 돌맹이에 불과한데 나에게는 보석이라함은, 이 차이는 내 마음에 보석이 자리할때 만이 돌맹이는 보석이 된다. 돌맹이로 보이는 사람에게 보석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내가 보는 것은 그것과 연관될 때만이 보이며 둘이 아닌 하나일 때만이 비로소 보인다. 모든 존재가 이와 같다. 모든 존재는 우리와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인식하고 존재하는 것이다. 따로 그 존재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공. 그러므로 존재는 공하다. 존재는 인연이다. 존재는 하나다.
이상은 은유가 아니다. 우리는 하나의 세계를 살고 있으면서 둘이 따로 존재한다는 상을 짓고 산다. 전도몽상이다.
반야심경을 말한다.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삼세의 고원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잡설 (0) | 2012.09.13 |
---|---|
공덕을 쌓아라 (0) | 2012.09.12 |
욕망에 관하여2: 욕심과 쾌락 (0) | 2012.08.31 |
욕망에 관하여 (0) | 2012.08.30 |
예수의 "왼빰도 돌려대라"의 참뜻 (0) | 2012.08.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