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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는 그와 같은 절대적 실재의 존재를 알고 있다고 어떻게 주장할 수 있을까요? 그와 동시에 '그것[물자체]을 알 수 없는 것'을 어떻게 단언할 수 있을까요? 이것이야말로 일종의 불합리한 개념적 곡예입니다. 하지만 내가 '말해지는 모든 것은 관찰자에 의해 말해지는 것이다'라고 주장할 때, 나는 또 다른 핵심적인 질문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실재, 진리, 그리고 존재의 본질에 대한 전통적인 철학적 담론 체계를 변화시킵니다. 이 질문은 주어지는 것으로 간주되는, 그리고 우리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외부 실재의 연구와는 더 이상 관계가 없습니다. 나는 관찰자로 작동함으로써 관찰자의 작동들을 이해하고 싶었습니다. 나는 언어 속에서 살아감으로써 언어를 설명하고 싶었습니다. 요컨대 우리 자신의 바깥에서부터 설명하고자 하는 것에 우리가 접근할 길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함으로 42)
2.
당연히 그렇습니다. 어쩌면 제가 썻던 아주 짧은 연극한토막이 설명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이 연극은 관객이 있는 극장에서 행해집니다. 갑자기 멋진 붉은 막이 올라갑니다. 그리고 무대로의 시야가 열리지요. 사람들은 한 그루의 나무, 한 여인과 한 남자를 보게 됩니다. 그 남자는 나무를 가리키면서 큰 목소리로 아주 연극적으로 말합니다. "저기 나무가 서 있군." 그러면 여인이 말합니다. "거기에 나무가 있다는 것을 넌 어떻게 아니?" 남자는 말합니다. "내가 그것을 보니까!" 이에 여인은 살짝 웃으며 말합니다. "아~" 그리고는 막이 내려집니다.
인식의 문제와 외적 세계의 역할을 둘러싼 오래된 논의, 얼마 전까지 그리고 로렌츠에게까지 지속되어 온 천년 이상 된 논의를 밝히는데 이 작은 연극이 적합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 연극에서) 우리가 그 남자에 동의해야하는지 그 여자에게 동의해야 하는지에 관한 결정할 수 없는 물음이 우리를 태고이래로 지배해 왔습니다. 그 남자는 관찰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나무와 환경을 주장하고 있고 그 여자는 반대로 그 남자가 그 나무를 보기 때문에 그 나무에 대해서 알 뿐이라는 점을 환기시키고 있습니다. (발명품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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