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내가 볼 때 '관찰하기'란, 자기가 무언가를 관찰하는 데 관련되어 있다는 자각과 함께 언어를 필요로 하는 인간적 작동입니다. 새를 단지 노려보고만 있는 고양이는 나에게는 관찰자로 보이지 않습니다. 고양이는 단지 새를 주시할 뿐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에서 고양이는 자신의 행위를 설명할 수 없으며, 또는 자신의 행동이 올바르고 적절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비판적으로 스스로에게 물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이 고양이는 적절하게 또는 부적절하게 행동할 수는 있어도 그 자신의 행위를 성찰하지는 못합니다. 오직 인간만이 성찰할 수 있을 뿐입니다.

관찰하기는 자기성찰이라는 말이죠?

맞습니다. 관찰자는 무언가를 구분하기 위해 어떤 구분을 사용할 때 자기의식적으로 행동합니다. 그들은 무언가를 보고 지각할 때 의식을 합니다. 무심코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사람을 나는 관찰자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들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우리는 관찰자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고찰하기 위해 고민하지 않고 단지 그 일을 계속하는 것이지요.(있음에서 함으로 56)


T.

내 생각에 우리가 현재에 깨어있으려면 관찰하기가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들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우리는 관찰자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현재에 깨어있는 성찰을 위해 예컨대 명상을 하곤 한다. 이때 관찰하기를 한다. 관찰하기를 통해 현재에 깨어있는 체험의 작동방식을 이해하고 다시 일상 생활을 하는데 이러한 성찰이 있고 없고는 그야말로 천지차이. 왜냐하면 성찰을 통한 앎의 앎이 우리를 (모른채 할 수없게) 얽메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찰한 사람은 자유로운 세상, 행복한 삶을 산출한다.

"우리가 관찰하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 그래서 구분을 하는 것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을 깨닫는 것. 우리는 새로운 체험 영역에 도달한 것입니다. 우리의 깨달음을 깨닫는 것 그리고 우리의 이해를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하고 있는 것에 대한 책임감을 낳을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구분 작동들을 통해 우리가 창조하고 있는 것에 대한 책임감을 낳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종류의 통찰에는 불가피한 어떤 것이 있습니다. 일단 이것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우리가 실제로 그것을 깨닫고 있는지 그릭고 또한 이 깨달음을 깨닫고 있는지를 우리 자신이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 체 할 수 없습니다." (함으로 58)


댓글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   2025/0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