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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기

자아와 공

T1000.0 2020. 12. 17. 15:22

1. 나 = (n-1)

자아는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영역 속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나에게 나라는 실체가 없다. 길다에 길다의 실체가 없는 것처럼.

 

2.

저는 제가 지각하는 대상을 고정적인 것으로 체험합니다. 그러니까 최소한 일시적이나마 인식과정의 결과물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결과물들은 당신의 과정학이 말하듯이 계속되는 변동의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닌 듯 합니다.

아니요. 우리가 대상(객체)이라고 말하는 것은 항상 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결코 하나의, 똑 같은 바로 그 대상을 지각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당신이 아침에 거울 앞에 서 있더라도 당신은 항상 다른 당신을 봅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저는 늘 나를 되풀이해서 인식해 왔습니다. 대상 그리고 얼굴들은 반드시 내 속에서 고정적이고 안정적인 인상을 불러 일으키는 (인식과정의 결과물로서의) 특징들을 갖고 있습니다.

당신은 아침마다 거울을 보고서 거울에서 보는 당신이 당신 자신이라는 확신을 갖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강조컨대 당신이 거울 속에서 보는 것은 결코 같은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변해가는 세계 속에서 결코 또 같은 '바로 그것'을 보지 않습니다. 지속적인 변화 속에서 어떻게 이런 안정적인 인상이 근거를 가질 수 있을까요? 이런 현상을 수학적으로는 상수를 산출해내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지속적인 변형의 과정에서 산출되는 상수 혹은 고정가치 말이지요. (발명품 27)

3.

 

이처럼 언어와 (그것이 나타나는) 사회적 맥락 전체가 생김에 따라 인간의 가장 깊숙한 경험인 정신과 자기의식이라는 새로운 현상이 생겼다. 그것에 걸맞은 상호작용의 역사를 거치지 않은 사람은 이 영역에 참여할 수 없다. 늑대소녀를 생각해보라! 그리고 정신이란 사회적, 언어적 접속의 그물에서 '언어 안에 존재'함으로써 나타나는 현상이지, 내 머리 속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의식과 정신은 사회적 접속의 영역에 속하며, 그 영역에서 의식과 정신의 역동성이 작용한다.

인간의 사회적 역동성의 일부인 정신과 의식은 또한 우리의 개체발생적인 구조적 표류가 밟는 길을 선택하는 작용을 한다. 나아가 우리는 언어 안에서 존재하므로 우리가 산출한 언어적 상호작용의 영역은 우리가 존재하는 영역의 일부가 되고, 따라서 우리가 그 안에서 정체와 적응을 보존해야 하는 환경의 일부가 된다. 로빈슨 크루소는 이것을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이 때문에 그는 날짜를 기록했고 저녁마다 성경을 읽었으며 저녁 먹기에 앞서 옷을 갈아입었다. 그는 마치 자기가 영국에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마치 자기가 사람답게 살면서 자기 정체와 적응을 보존할 수 있었던 언어적 영역에서 사는 것처럼 행동했다.

이런 것들에 대해 과학자로서 말하는 우리의 처지도 다를 게 없다. 우리는 우리가 말하고 행하는 것을 통해 산출하는 언어적 영역(사회적 영역)에서 과학자라는 우리의 정체를 보존한다. 그렇지 않으면 과학자로서 우리는 사라지고 만다.

구조는 얽어맨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일은 행동을 둘러싼 언어적 영양의 흐름을 통해 우리가 쉬지 않고 엮어가는 구조접속의 그물체 안에서다. 언어란 그저 어떤 바깥세계를 내면화하려고 누가 만들어내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것은 그런 세계를 드러내는 도구로 쓸 수도 없다. 인식활동은 언어를 구성하는 행동조정을 통해 언어 안에 존재함으로써 세계를 오히려 산출한다. 우리의 언어적 접속이 우리의 삶에 형태를 보여한다. 그것은 우리가 언어를 가지고 우리를 들어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언어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우리는 우리가 다른 이들과 함께 산출하는 과정적 존재로서 존재한다. 이 공동체개체발생적 접속 안에서 우리는 이미 전부터 있어온 준거점도 아니며, 한 기원을 준거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 내는 언어적 세계의 형성과정 안에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앎의 나무 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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