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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 청정은 더러움과 상대하는 깨끗함이 아니고 더러움과 깨끗함을 탈영토화한 절대인데, 말하자면 청정은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다. 있는 그대로 일 뿐. 하나의 척도를 통해 더러움과 깨끗함을 나누지 않으므로 상대적 개념이 아니고 또 어떤 공통의 척도를 갖지 않으므로 절대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청정함에는 어떤 걸림도 없다. <천의 고원>의 표현을 빌자면 매끄러운 일관성의 평면이라 할 수 있겠다.
청정함은 더러운 것도 깨끗한 것도 아니기에 더러운 것이 청정한 것이되고 또 깨끗한 것이 청정한 것이 되는데,
청정, 절대적 탈영토화를 예술을 통해 예시해주는 것으로 생각되는 글이 있어 인용해 본다.
이처럼 모든 것을 횡단하며 존재론적 평면 위에서 하나로 묶어 주는 것을 '평면화'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횡단적 추상화의 극한이다. 다만 다시 강조해야 할 것은, '평면'에 함축된 이러한 평등성이 비교가능한 것이 아니라, 각자가 다른 것인 채 평등한 위상을 갖는 것이란 점에서, 어떤 공통의 척도를 갖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이런저런 존재자들을 '존재'라는 보편적 본질 - 이것은 본질이 될 수 없음을 하이데거는 이미 반복하여 지적한 바 있다 - 이나 공통성으로 묶어 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음악과 비음악이 '음악'이란 이름으로 하나로 묶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상반되는 본질을 갖는 것들을 횡단하여 묶고 연결하고 변형시키는 그런 추상화다.
'존재론적 평면화'라고 명명할 수 있는 이런 추상화를 통해 우리는 모든 소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일반화된' 음악의 평면에 도달하게 되고, 모든 것을 작품으로 묶어 주는 '일반화된' 예술의 평면에 도달하게 되며, 모든 동작/비동작을 무용으로 묶어주는 '일반화된' 무용의 평면에 도달하게 된다. 수많은 요소들이 어떠한 벽이나 심연 없이 넘나들며 만나고 교차하며 접속하고 이탈하는 것으로 묶어 주는 이 평면에 우리는 '일반성'이란 이름을 붙일 수 있다. 이 경우 일반성이란 보편성이나 어떤 고유한 본질을 통한 일반화(보편화)와 반대로 그런 보편성을 가로지르고 고유한 본질을 지우는 방식으로 도달하는 일반성이고, 공통성이나 공통형식의 추출을 통해 도달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탈형식화하는 방식으로 도달하는 일반성이다. 그것은 횡단가능성 내지 변환을 통해 도달할 최대치의 폭을 뜻하며, 넘지 못할 어떤 본질도 없기에 곧바로 다시 가로질러질 경계선이다. 이러한 일반화가 어떤 본질을 특권화하는 것과 반대로 그것의 특권을 무력화하는 일반화라는 것은 굳이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 이진경, <코뮨주의> p155
인용한 글에서 멋지게 제시하고 있듯이 현대예술에선 음악과 비음악의 경계를 넘어 '음악'이란 이름으로 묶이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청정함의 사례다. 음악에 쓰이는 소음이 음악이 되듯이 청정함에는 더러움도 청정함이다. 이것은 하나의 척도 내지 형식을 통해 상대적으로 파악해 나가는 것과 반대로 그 척도를 지우고 탈형식화하는 것을 통해 하나로 묶어내는 것이다. 요컨대 청정함은 탈형식화 내지 탈영토화하여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이다. 불교 용어로는 '진여'.
예술이 그런 것처럼 삶에서도 청정함의 시선으로 살아간다면 더러운 것도 깨끗한 것도 없이 자유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을 당연한 이치인데, 나로서는 철학이 삶이 되고 삶이 예술이 되는, 즉 그 경계들을 허물고 횡단하는 이른바 절대적 탈영토화 수행에 집중하기를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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