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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행/식/명색/육입/촉/수/애/취/유/생/노사
12연기는 과거/현재/미래의 윤회로 반복된다. 반복이 이뤄지는 원리는 원인인 동시에 결과가 되고 결과인 동시에 원인이 되다보니 또는 원인을 결과로 보고 결과를 원인으로 보다보니 반복은 무한하다.
12연기중 현재에 해당하는 것은 식부터 유까지로 8연기라고도 한다.
8연기 중에 애는 욕구에 해당하는데 하고싶거나 하기싫거나하는 감정이 발생한다.
욕구의 출현은 욕구에 사로잡히는 집착, 취로 연결되고 욕구를 취해 행위를 일으키면 그에 대한 결과로 열매이자 씨앗이 생기는데 이것이 유다. 유는 애를 취함으로써 생기는 결과물인데 이 결과(열매)가 다시 원인이되어, 씨앗이되어 생노사로 이어진다.
이때 생노사는 현재로 부터 이어지는 미래에 해당하며 이는 미래의 반복을 예정한다.
다시 현재로 돌아와 애 이전에, 즉 욕구는 어떤 원인을 갖냐면 식/명색/육입/촉/수의 과정을 밟는데 먼저 ㅂ명색은 세상의 모든 물질을 의미한다. 사물들은 사물들인 뿐인데 인간의 영역에서 사물은 이름과 모양으로 존재한다. 같은 모양의 나무가 목재와 장작으로 달리 부르듯이 모양은 같아도 이름이 다르다. 외부사물이 육입, 우리의 6가지 감각기관을 만나 부딪쳐 촉을 이루면 상호작용에 따라 수를 일으키는데, 이때 수는 느낌, 감정등이 감지되는 감각 작용인데 수는 동시에 좋고 싫음을 욕구하는 애의 원인으로 생각하기 싶지만 진짜 원인은 명색 이전의 식에 있다. 식은 현재의 모든 출발이며 모태다. 이 모태가 틀을 이룬 것을 업식이라고 말하며 이 업식이 명색을 만나 수를 일으키고 애를 일으키고 취로 이어진다. 다시 취는 결과로서 유를 낳고 유는 다시 씨앗이 되어 생하고 노사가 되는 미래의 반복을 되풀이하면 이 순환을 통해 업이 쌓인다.
헌데 현재의 식이 업식이 되는 것은 필연적으로 과거로부터 온 결과인데 이에 해당하는 것이 무명과 행이다. 무상한 우리의 삶은 원인들의 무한한 연쇄인데, 이 원인들의, 달리표현하면 이 인연들의 질서와 관계가 어떤 법칙으로 형성되는지 알 수 없기에 이는 마치 불확정성 원리의 전자의 움직임을 파악할 수 없듯이 그 질서를 모른다. 즉 형성되어진 것이나 어떻게 형성되는지는 모른다. 우리는 그 결과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데 이 알 수 없는 원인들의 무한한 연쇄인 무명이 형성됨을 통해, 즉 행을 통해 식을 이룬다. 이렇게 과거를 통해 현재로 이어진 식이 업식을 이루며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오온, 색수상행식의 쌓임이 나의 업식을 이룬다. 중요한 것은 수의 원인이 외부 작용체인 명색이 아니며 명색은 유발할 뿐이며 수의 원인은 식에 있음을 주목하자. 식은 무의식의 영역이다.
이를 주목하는 이유는 식이 모든 것의 출발임을 분명히 알 때 12연기의 윤회를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수가 식으로 인해 생기는 것을 바로 알 때 수가 애로 이어지는 것을 끊을 수 있다. 또는 수가 취로 이어지는 것을 끊을 수 있다. 나의 욕구와 충동에 의지해 삶을 영위하지 않고 행위에 대한 원인과 결과에 의해 이 인과 관계가 나와 나의 삶에 좋은 것인지를 판단해 삶을 영위할 때 욕구에 매이지 않고 어디에도 자유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된다. 인과를 판단하는 문제는 지혜와 관련되어 있으며 핵심은 우리의 신체에 즉 몸과 마음에 좋은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좋은 것을 취하는 길이 윤리학의 길이며 윤리학은 좋은 것을 취하여 기쁨을 누리는 기쁨의 윤리학일 수 밖에 없다. 왜 윤리학이냐 하면 윤리학은 선과 악을 너머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분해 우리를 기쁨이 충만한 삶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스피노자가 바로 이것을 <에티카>에서 말하고 있는데, 나는 우리의 선조가 강조한 '양생의 도' 역시 기쁨의 윤리학과 동일하다고 본다.
한편 흥미로운 것은 불교는 12연기의 윤회를 통해, 나의 업식을 비춰볼 수 있음을 지적한다. 나의 업식이 수를 통해 반응하는 것을 보고 나의 업식을 비춰보는 것이다. 나의 업식이 이럴때 반응하는구나 하고 관찰하므로써 나의 업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직접 파악할 수는 없지만 불확정성 원리를 파악하는 것처럼 비춰보는 것을 연상시킨다. 식이 무의식의 영역이고 내가 나의 업식을 비춰보고 나의 업식에 휘둘리지 않는 자유를 행한다면 우리는 무의식을 정복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유튜브에 있는 법륜스님의 반야심경 강의:12연기 참조.
업식을 정복한다는 것은 업식을 거부하거나 부정하거나 참는 것이 아니며 업식을 업식으로 알고 업식이 일으키는 파도에 몸을 실어 평상심을 유지하는 데 있다. 이때 평상심은 겉으로 볼때 업식을 부정하는 것도 같고 때론 긍정하는 것으로 보일텐데 이는 업식에 끄달리지 않고 능히 다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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