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할 뿐
다만 할 뿐은 다만 욕망할 뿐이다. 다만 할 뿐은 욕망의 내재적 과정을 중단하지 않는 것이다. 다만 할 뿐, 다만 욕망할 뿐은 어떤 결핍도 없다. 그러니 바라는 게 없다(無得). 바라지 않는다는 것은 외부에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 다만 할 뿐은 자신을 뛰어넘어 주어지는, 외부에 의존하는 쾌락을 멀리한다.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쾌락을 바라지 않는 이유는 쾌락이 욕망의 과정을 중단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 것도, 쾌락조차 바라지 않는 다만 할 뿐의 경우 "욕망에는 어떠한 결핍도 없고 욕망은 그 과정을 중단시킬 모든 쾌락들로부터 자유롭다." 그대 자유롭고 싶은가? 다만 할 뿐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천의 고원>
2012. 9. 6. 19:28
[중도 혹은] 기관 없는 신체를 어떻게 이룰 것인가?
어떻게 기관없는 신체를 이룰 것인가?란 화두를 나는, 어떻게 중도를 이룰 것인가? 내지 어떻게 중도적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한 힌트로 받아들인다. 두 질문을 마주보게 할때 서로가 말하는 것을 더 잘 알게 되는 것 같다. 왜냐하면 둘은 스피노자식으로 말해서 실체의 속성을 다르게 표현한 사유의 양태들로 여겨지기 때문인데 이는 저자들이 말하는 기관없는 신체는 스피노자의 에 나오는 개념들이 현대적으로 재탄생된 느낌을 주는 것과도 같은 맥락이다. 예컨대 신은 내재성의 장으로, 실체 내지 실체의 속성은 욕망으로, 실체의 무한한 속성[다양하게 분포하는 욕망의 강밀도]들을 표현한 양태들은 기관없는 신체들로 변양된 느낌을 주는데, 이러한 느낌은 스피노자와 저자들 모두의 이해를 높이는 효과가 있는 것 같다. 이같은 맥락에..
들뢰즈와 가타리<천의 고원>
2012. 9. 6. 1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