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하면 지구 위에서는 매우 중요하면서도 불가피한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데, 이는 여러 면에서 유익한 동시에 다른 여러 면에서는 유감스런 것이기 때문이다. 지층화가 바로 그것이다. 지층은 층, 띠다. 그것은 질료에 형식을 부여하고, 공명과 잉여성의 체계 속에 강렬도를 가두거나 특이성을 고정시키며, 지구의 신체 위에 크고 작은 분자들을 생산하고 그것들을 몰적 전체로 조직화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층은 포획이다. T1000.0 : 우리가 에 매료되는 이유 중에 하나는 이전에 불교나 스피노자가 다룬 신체와 마음의 문제를 지구나 국가 등 몸 밖으로 확장해 펼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지층은 유익한 동시에 유감스러운 것이라 했는데 이는 불교의 예를 들면 표상력의 위상이 지층의 그것과 일치한다. 표상작용은 여러..
반면 "동일한 분자, 동일한 실체, 동일한 형식도 아닌" 그런 통일성은, 각각의 지층에 고유한 어떤 구성단위를 넘어서 질료 내지 질료적 흐름 자체로까지 추상을 밀고 나갈 때 가능합니다. 이미 우리는 '실체'란 "형식화된 질료"라는 정의를 본 적이 있지요? 그렇다면 역으로 모든 형식을 넘어선 질료로 나아가는 것 또한 상상할 수 있을 겁니다. '기관 없는 신체'란 개념이 거기에 있었던 것도 기억하시지요? 기관 없는 신체, 혹은 질료적 흐름 자체는 분자나 원자, 실체, 형식 등의 모든 형식을 넘어서, 가장 기본적인 구성단위조차 탈형식화해서 추상된 개념이고, 그런 점에서 탈형식화하는 방식으로 추상하는 추상기계가 도달하는 지점입니다. 모든 것을 오직 강밀도의 정도만으로 추상하는 기가, 다시말해 오직 강밀도의 차이..
개별적인 언표는 없다. 단지 언표를 생산하는 기계적 배치들만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그 자체론 무의식이다. 우선 우리는 그 배치가 근본적으로 리비도적이고 무의식적이라고 말한다. 우선 우리는 배치들이 몇몇 종류의 요소들(혹은 복수성들)을 가지고 있음에 주목할 것이다. 몰적으로 조직된 인간적, 사회적, 기술적 기계들; 비인간-되기의 입자들을 가진 분자적 기계들; 오이디푸스적 장치들(물론 오이디푸스적 언표들이 있어서, 너무 많이 있어서 하는 말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가변적인 양상과 기능을 갖는 반-오이디푸스적 장치들. 우리는 이후 그것을 검토할 것이다. 우리들은 구별되는 기계들에 대해서 말할 수 없으며, 다만 상호 관통하면서 주어진 계기에 단일한 기계적 배치를 형성하는 복수성의 유형들에 대해서만, 즉 리비도..
사랑을 하면서 섹스를 한다면 어느 누구든 그 자신에 대해 전적으로--그리고 다른 사람과 더불어--기관없는 신체를 이루게 된다. 기관없는 신체는 기관들이 제거된 텅 빈 신체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기관으로서 봉사하는 것(늑대들, 늑대의 눈, 늑대의 발톱)이 브라운 운동을 하면서, 분자적 복수성의 형태로 무리적 현상에 따라 분배되는 신체다. 사막은 무언가로 가득차 있다. 따라서 기관없는 신체는 기관들에 대립된다기보다는, 오히려 기관들이 유기체를 구성하는 한에서 그것들의 조직화(기관화; organization)에 대립된다. 기관없는 신체는 죽은 신체가 아니라 살아있는 신체로서, 그것은 유기체와 그 조직화를 제거한 후에 더욱 더 생동감있고 웅성거린다. 바닷가를 향해 달려드는 이, 피부에 서식하는 무리들. 기관..
프래니는 늑대들에 관한 프로그램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나는 그녀에게 말한다; 너는 한 마리의 늑대가 되고 싶니? 거만하게 대답한다; 이런 바보! 우리는 한 마리의 늑대가 될 수 없어. 우리는 항상 여덟 마리나 열 마리 혹은 여섯 마리나 일곱 마리의 늑대야. 오직 혼자서 동시에 여섯, 일곱 마리의 늑대가 될 수는 없지. 그러나 대여섯 마리의 늑대들과 더불어, 그들 사이에서 한 마리의 늑대가 될 수 있어. 늑대-되기에서 중요한 것은 군중의 위치며, 특히 무리 내지 복수의 늑대들과 관계에서 주체 자신의 위치야. 즉 그가 무리 속에 들어가거나 들어가지 않는 방식, 그가 [무리에 대해] 취하는 거리, 그리고 그가 복수성을 취하거나 취하지 못하는 방식 말이다. 프래니는 자신의 대답의 가혹성을 완화하기 위해 꿈 이..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과학의 이름으로 주장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만큼이나 과학성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단지 배치만을 알 뿐이다. 그리고 언표행위의 집단적 배치로서 욕망의 기계적인 배치만이 있을 뿐이다. 의미화도 주체화도 없다. n으로 쓰는 것만이 있을 뿐이다(모든 개별적인 언표행위는 지배적인 의미작용에 사로 잡혀 있으며, 기표적인 모든 욕망은 지배받는 추제들과 관련된 것이다). 다양성 안에서 배치는 기호적인 흐름과 물질적 흐름, 사회적 흐름에 강하게 작용한다(이론적 내지 과학적인 자료군 안에서 그 흐름들로부터 만들어질 수 있는 어떠한 반복에 대해서도 독립적으로). T1000.0 : 언표행위의 집합적 배치와 '오온五蘊', 욕망의 기계적 배치와 '업식業識', 과 의 회통에 관해서 또..
리좀은 전혀 다르다. 그것은 모상이 아닌 지도다. 모상이 아니라 지도를 만드는 것. 오르키데는 말벌의 모상을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리좀의 한가운데서 말벌과 함께 지도를 만든다. 지도가 모상에 대립한다면, 이는 지도가 현실과의 관련 속에서 전적으로 실험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도는 스스로에 갇혀있는 무의식을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구성한다. 지도는 장場들의 접속에 기여하며, 기관없는 신체의 봉쇄를 푸는데 기여하고, 일관성의 구도 상에서 최대한으로 개방하는데 기여한다. 지도는 그 자체로 리좀의 부분이다. 지도는 열려있으며, 모든 차원들과 접속될 수 있으며, 개인이나 집단, 사회 형성체에 의해 작동될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을 벽에다 그릴 수 있고, 예술작품으로 간주할 수도 있으며, 정치적인 ..
악어는 나무통을 재생하지 않으며, 카멜레온 역시 그 주위의 색을 재생하지 않는다. 핑크 팬더는 아무것도 모방하지 않으며 아무 것도 재생하지 않는다. 그는 세계를 핑크 위에 핑크를 입히며 자신의 색깔로 칠할 뿐이다. 이것이 그 자신이 지각할 수 없게 되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의미화하지 않는 방식으로, 단절과 자신의 탈주선을 만드는 방식으로, 그 '비평행적인 진화'를 끝까지 몰고가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세계-되기다. T1000.0 : '되기'를 통해 '자신을 지각할 수 없게 되는 방식이란 무아無我가 아니겠는가. '나' 없음을 통해 나를 지각할 수 없게 되는 방식으로 나는 세계-되기를 이룬다. 무아-되기가 곧 세계-되기. 무아는 '나'는 없으며 '나가 없는 것'도 없음인데 '나가 없는 것도 없음'이 '되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