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좀 안에는 수목적인 마디들이 있으며, 뿌리 안에는 리좀적인 압력이 있다. 더 나아가 리좀에 고유한 전제군주적인 형성체, 내재적이고 운하화하는 형성체가 있다. 나무, 바람뿌리와 땅 속 줄기의 초월적인 체계 내에는 무정부적인 변형이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나무-뿌리와 리좀-운하는 두 모델로서 대립하는 것은 아니란 점이다. 전자는 모델로서, 초월적인 모상으로서 작동하지만, 자신의 고유한 탈주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후자는 모델을 전복시키고 지도를 초안하는 내재적인 과정이지만, 그 나름의 고유한 위계를 구성하기도 하며, 전제군주적 운하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어떠한 영토에 자리잡는 지도, 역사의 어떠한 순간에 자리잡은 것인지도 아니며, 나아가 정신의 어떠한 범주에도 관련되는 가도 아니다. 문제는 끊임..
그 외침조차도 밀고 나가기 어려운 것이지만 사실 복수적인 것을 찬양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인쇄나, 어휘, 혹은 통사적인 기교조차도 이를 이해시키는데 불충분할 것이다. 복수적인 것, 항상 하나의 우월한 차원을 덧붙임으로써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가장 간단하게 말해서, 절제에 의해, 우리가 자유롭게 다루는 차원들의 수준에서 언제나 n-1(언제나 감해짐으로써만 복수적인 것의 일부를 이루는 것)로써 만들어져야 한다. 구성되고 있는 다양성으로부터 유일자를 빼는 것, 이를 n-1로 이라고 쓰자. 이러한 체계를 리좀(rhizome)이라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T1000.0 : n-1의 다양체, 리좀. n-1는 불교에서 말하는 무자성無自性과 회통하는 표현으로 생각된다. 요컨대 n-1, 혹은 중심의 제거, 바로..
한 권의 책은 대상도 주체도 갖지 않는다. 그것은 다양하게 형식화된 질료와 그리고 매우 상이한 날짜, 속도들로 만들어진다. 그 책에 하나의 주체를 부여하는 순간, 우리는 질료의 가공과 그것의 관계가 갖는 외재성[외부성]을 무시하게 된다. 그것은 지질학적인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선량한 신을 만들어 내는 것과도 같다. 모든 사물들에서 그렇듯이 한 권의 책에도 분절의 선들, 혹은 선분성의, 지층의, 영토성의 선들이 존재한다. 뿐만 아니라 탈주의 선들, 탈영토화 운동의 선들 그리고 탈지층화의 선들이 존재한다. 이 선들이 따르는 흐름의 상대속도는 상대적인 지연, 점성[엉겨붙는]의 현상을, 아니면 이와 반대로 급속함과 단절의 현상을 야기한다. 이 모든 것들, 선들과 측정가능한 속도들은 하나의 배치를 구성한다. 한 ..
우리는 둘이서 를 썼다. 우리들 각자는 여럿이었기 때문에,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있었던 셈이다. 우리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것에서부터 가장 먼 곳에 있는 것까지 손에 닿은 것이면 무엇이든지 이용했다. 알아보지 못하게 하려고 우리는 교묘한 가명들을 분배해 놓았다. 그렇다면 왜 우리 이름은 남겨뒀는가? 관례상, 그저 관례상. 바로 우리를 알아보지 못하게 하려고. 우리 자신이 아니라 우리가 행동하고 느끼고 사유하게끔하는 것을 지각할 수 없게 하려고. 게다가 모든 사람들이 만하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니까. 고들 말하지만, 그건 사람들의 어법일 뿐이라는 걸 누구나 알고 있으니까. 더 이상 라고 말하지 않는 지점에 이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라고 말하든 말하지 않든 더 이상 아무 상관이 없는 지점에 이..
마조히스트의 고통은, 쾌락에 이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욕망과 그 외재적 척도인 쾌락을 잇는 사이비 결속을 해체하기 위해 그가 치러야만 하는 대가다. 쾌락은 오직 고통이라는 우회로를 통해서만 얻어낼 수 있는 어떤 것이 결코 아니다. 쾌락은 가능한 한 지연되어야만 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긍정적 욕망의 지속적 과정을 중지시키기 때문이다. 마치 욕망이 그것 자체와 그것의 명상으로 채워져 있듯이, 욕망에 내재하는 기쁨이 존재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는 결여나 불가능성을 의미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쾌락에 의해서 측정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바로 이 기쁨이야말로 쾌락의 강렬도들을 분배하고 그것들이 공포, 수치, 죄책감으로 뒤덮이는 것을 막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마조히스트는 기관없는 신체를 구성하고 욕망의 ..
불교의 눈으로 보면 기관없는 신체는 중도(中道)이며, 내재성의 장 혹은 일관성의 구도는 공(空)이다. 이 둘의 관계는 서로에 대한 증거로 이해할 수 있으며, 서로에 대한 이해를 더 높여준다.[양경쌍조] 또한 이렇게 생각되기도 한다. 중도와 공의 사상이 확장된. 기관없는 신체와 내재성의 장은 대승의 대승 혹은 대승의 바깥으로 여겨진다. 한 개인 또는 대중들 뿐 아니라 사회, 국가, 시스템의 해탈을 꿈꾸게 하기 때문이다. 나의 경험을 보면 나는 기관없는 신체를 먼저 만났다. 처음 그것은 이해가 되지않았지만 마술같은 매력에 이끌려 늘 나를 따라다니는 화두가 되었다. 화두를 쫒다가 중도와 공을 만나게 됐고, 그리고 중도와 공이 기관없는 신체를 이해할 수 있는 신체로 만든 것 같다. 위대한 개념은 내가 이해할 수..
지혜는 따로 필요하지 않다. 최초의 지혜는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볼 때만이 대상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고 비로소 대상에 대한 지식이 생기고 지식을 활용하는 지혜가 생기고...한다. 지혜는 따로 필요 없다. 있는 그대로 보면 될 뿐이다. 반야심경도 이와 똑같이 말한다. "無智亦無得" 있는 그대로 보는 데 지혜가 따로 필요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해 따로 얻을 것도 없다. 있는 그대로 보면 그뿐이다. 다만 그렇게 할 뿐이다. 다만 할 뿐이다.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해선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거든 지혜를 구할 게 아니라 버려야 한다. 나에게 형성되어진 편견, 무의식, 업식을 내려놓아야 비로서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 있는 그대로를 보기위해 버린다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