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어휘들에 대한 당신의 거부는 제게 약간 과장된 것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거부는 이미 관습화되어 있고, 제가 볼 때, 유행이 된 개념들을 간과하니까요. 사실 그런 개념들은 아주 효율적이어서 서로 대화를 시작함에 있어서 대화의 토대를 새삼스레 설명할 필요 없이도 공통의 이해를 기반으로 서로 얘기할 수 있게 해 주니까요. 당신이 관습화된 상호이해 및 커뮤니케이션이라고 지칭한 것들이 저에게는 오히려 상호오해 및 비커뮤니케이션으로 보입니다. 저는 다른 사람이 저에게 '하인츠 혼 푀르스터는 구성주의자야! 구성주의자들은 모든 것이 환영이라고 믿고 세상에는 어떤 실재적인 대상도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야'라는 식으로 이름표를 붙이거나 어떤 어휘를 고정시키는 짓을 하지 않고 제 말에 귀를 기울이다면 훨씬 편할 ..
1. 도대체 무엇이 당신으로 하여금 세상과 지각의 일치(상응)를 그토록 절대적으로 요구하게 만드나요? 사실 우리 눈앞에 아름다운 붉은 머릿결을 가진 소녀가, 붉은 주사위가, 혹은 붉은 식탁이 놓여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2. 우리가 아는 것은 우리가 뭔가를 지각하고 있다는 사실이며 그 이상은 아닌 것입니다. 3. 그런데 사람들은 대개 우리의 감각이 세상 속의 대상들을 확증한다는 데서 출발합니다. 4. 탁자를 보고는 가까이 다가가서 나무를 만져보고 그리고는 믿습니다. 탁자를 느낀 촉감은 탁자의 존재를 검증하며 눈이 받아들인 것을 최종적으로 검증한다고. 5. 확증에 대한 이같은 생각은 내게는 아무 의미 없어 보입니다. 왜냐하면 마지막에 탁자로 확인되는 어떤 실재의 존재 자체는 이미 전제된 것..
1.정신분열증을 확정짓는 범주 또 한 번 짧은 이야기로 답해 보겠습니다. 오래 전에 정신연구소가 샌프란시스코에서 대규모 학술대회를 주최하는데 그 대회의 표어는 '세계 지도들 그리고 정신의 지도들'이였습니다. 이 제목은 알프레드 코르칩스키의 유명한 명제를 본뜬 것이었습니다. 그는 '일반 의미론'의 창시자인데 이라는 자신의 두꺼운 책에서 'The map is not the territory.'라고 써는데 지도는 땅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진술은 다른 뜻도 있지만 정신분열증을 확정짓는 하나의 범주입니다. 그에 따르면 정신분열증 환자는 이름과 물건(이름이 지칭하는 물건), 상징과 대상(상징이 사용된 대상)을 혼동합니다. 그런 사람은 야채수프를 적어 놓은 메뉴판을 먹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게 스프라고 ..
1. 그래서 좋고 나쁜 것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부드러운 건 솜이 제일이고, 날카로운 건 칼이 제일입니다. 솜이 좋으냐, 칼이 좋으냐 이렇게 따질 수 없듯이, 목이 아파서 말이 안 나오면 그것 자체는 나쁘지만 묵언하는 데는 이보다 좋을 수 없습니다. 노력하지 않아도 묵언이 저절로 되지 않습니까? 이처럼 우리가 처한 상황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삶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법륜스님의 행복 전하기 38) 2. 달라이 라마는 그것을 이렇게 설명했다. "사건을 다른 시각에서 보는 능력은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수행을 하는 사람들은 어떤 경험과 비극적인 일도 마음의 평화에 이르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든 일과 사건이 한 가지 면이 아닌, 여러 가지 면을 갖고 있음을 깨달아야합니다. ..
1. 이것이 바로 스피노자가 자연Nature이라고 부르던 것이다: 욕구에 기초해서, 즉 수단과 목적에 따라서 영위되는 삶이 아니라, 생산, 생산성, 능력에 기초에서, 즉 원인과 결과에 따라서 영위되는 삶. (들뢰즈, p10) 2.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제발 천상에 태어나게 해달라고 빕니다. 그것 때문에 부처님이 필요하지 안 그러면 무엇 때문에 부처님이 필요하겠습니까? 부처님 믿으면 천상에 보내 준다니까, 부처님 믿으면 지옥에 안 간다니까 부처님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거기만 갈 수 있다면, 부처님 안 믿어도 간다면 부처님도 필요 없고, 하느님 믿어서 간다면 하느님 믿는 것 아닌가요? 우리는 지금 부처님이 필요한 게 아니고 돈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돈이 목적이고 부처님은 수단입니다. 부처..
그에 맞는 짧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가 스탠포드 대학에서 겪었던 이야기입니다. 저는 장래의 언론이들에게 강연을 하기위해 그곳에 갔었습니다. 학과 건물을 들어서면서 저는 문 위에 금언이 적힌 것을 봤습니다. '있는 그대로 말하라Tell it as it is!' 저는 들어가서 제 강연을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저는 그 문장을 보고 기뻤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 문장이 약간 달라져야 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당신이 말하는 대로 있는 것이다! It is as you tell it! 원래의 표현은 자기 자신의 보도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벗어나는 데에만 기여합니다. 당신들은 그런 방식으로 수동적인 기록자들 혹은 녹음기로 유형화되는 겁니다. 그에 반해 저는 당신들이 ..
당신 삶에서 묶여 있음의 경험이 있나요? 다소 벗어납니다만, 작가인 쿠르트 마익스가 한 번은 당신과 같이 갔던 등산에 대해서 쓴 적이 있습니다. 산행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등산을 가면 사람과 사람을 묶어 주는 밧줄에 의지해서 걸어가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모두 밧줄에 묶여서 가는 것이 묶여있음이라는 이념의 구체화로 여겨지는데요. 결코 벗어나는 얘기가 아닙니다. 등반에서 한 줄에 묶여있다는 생각은 믿을 수 없는 소속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정말 멋진 예입니다. 암벽에 강철고리를 박고 사람들을 묶어주는 밧줄을 고리에 넣어 연결합니다. 쿠르트 마익스도 쓴 바 있는데, 그와 함께한 체험이 있습니다. 아마 당신도 들은 적이 있을 겁니다. 우리는 그의 여자친구와 아주 유명한 늙은 산악인과 함께 토어슈타인 ..
이제 또 다른 대립이 등장하는 군요. 객관성 혹은 주관성, 그리고 그런 인식론적 입장으로부터의 각각의 결과들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세상,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 그리고 운명들과 내가 한데 묶이는가 아니면 나의 인식론적 입장에서 인해서 내가 세상과 분리 된 것으로, 그러니까 가상의 중립넉 관찰자의 입장에서 관찰하는 사람으로 여겨지는가 하는 근본적인 물음이 오히려 훨씬 중요하게 되는 거지요. 잘 표현된 듯 하군요. 실재성, 객관성, 존재론 등 이 모든 것들은 세상과의 분리를 위해서 사용되는 정태적인 개념입니다. 이 개념들은 개념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무관심(어찌 되어도 자신은 상관없다는)을 불가피한 것으로 드러내기 위하여 사용됩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들은 고정되고 무시간적인, 바꿀 수 없는 현실존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