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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또 다른 대립이 등장하는 군요. 객관성 혹은 주관성, 그리고 그런 인식론적 입장으로부터의 각각의 결과들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세상,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 그리고 운명들과 내가 한데 묶이는가 아니면 나의 인식론적 입장에서 인해서 내가 세상과 분리 된 것으로, 그러니까 가상의 중립넉 관찰자의 입장에서 관찰하는 사람으로 여겨지는가 하는 근본적인 물음이 오히려 훨씬 중요하게 되는 거지요.
잘 표현된 듯 하군요. 실재성, 객관성, 존재론 등 이 모든 것들은 세상과의 분리를 위해서 사용되는 정태적인 개념입니다. 이 개념들은 개념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무관심(어찌 되어도 자신은 상관없다는)을 불가피한 것으로 드러내기 위하여 사용됩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들은 고정되고 무시간적인, 바꿀 수 없는 현실존재(존재하는 것)와 관여하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얘기한 짧은 연극에 등장하는 남자는 스쳐가면서 펼쳐지는 우주를, 나무를, 사물을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마치 열쇠구멍을 통해서 보듯 그렇게 바라봅니다. 그러니까 그 자신이 책임감을 느낄 필요는 없는 겁니다. 그는 훔쳐보기 철학의 대변자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것도 자신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어떤 것도 그를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의 무관심한 태도는 용서되는 것입니다. 이는 어떤 사람이 자신은 일어난 일과 관련이 없고 그래서 자신을 손을 씻고 결백함을 주장하는 폰티우스 필라투스 현상입니다. 반면 그 여인은 뭔가를 보고 관찰하는 것은 언제나 사람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이제 두 가지 근본적으로 구분되는 입장을 대조시킬 수 있습니다. 관여되지 않은 서술자의 태도가 자신을 세상의 일부로 파악하고 자신이 무엇을 하든 그것이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공감하고 관여된 사람의 태도와 대립됩니다. 공감하고 관여하는 사람은 세상과 한데 묶여 있고 세상의 운명과 묶여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행위들에 책임을 집니다. 세상은 이런 사람의 입장에서보면 적대적인 어떤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세상은 분리되지 않은 하나의 기관으로, 자신의 신체의 일부분으로 보이게 되는 것이지요. 우주와 자신이 결합됩니다. 또 현실 존재(존재하는 것)를 둘러싼 투쟁이라는 늘 등장하는 무서운 개념으로부터 벗어나 조화로운 공동 작업이 생겨납니다. (발명품 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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